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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하찮은’ 미술비평?

김병수

지금 미술비평계는 어수선하고 어리둥절하다. 꽤 오래전부터 우리는 그것을 비평의 위기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위기라는 문제는 심각할지라도 원인이 있고 그것에 대처할 방도가 있기 마련이다. 과연 현재 미술비평에 대하여 그러한 진단으로 이 상황을 빠져나올 수 있을까? 오히려 미술비평은 존재론적 망각의 잔영으로서 연명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여러 종류의 해석학적 시도가 난무하는 현상이 목도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연한 미술비평은 역설적이게도 “미술비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다시 요청받고 있다. 그것이 미술인 안에서 자신의 한계에 대한 능력을 검토하는 것이 급선무인 것이다. 그리고 사회와 문화의 관계 혹은 그 그물망에서 활동하는 부정의 변증도 중요한 임무이다. 가장 현실적으로는 미술이 몸담고 있는 예술계에서 그것의 행위 수행성에 대하여 해명하는 것이다. 바로 미술작업에 대한 미학적 판단이다. 그런데 이와는 다른 리서치가 있다. 


2002년 뉴욕의 컬럼비아대에서 있었던 일이다. 국립예술저널리즘 프로그램으로 미국의 현역 미술 평론가들에게 설문조사를 실행했는데 미술작품에 대한 실제적인 판단은 자신들의 작업에서 최소한의 중요성을 가질 뿐이라는 응답이 75%가 넘게 나왔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연구가 없어서 미루어 짐작해볼 뿐인데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도대체 미술평론가들은 무엇을 하는가? 기술(記述)한다. 일종의 받아쓰기이다. 기술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기술이 분류, 맥락, 설명, 해석, 분석 등과 유기적으로 이어져 평가에 이른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현대 미술비평에서 가치와 평가의 문제는 이른바 미술시장으로 넘어간 듯하다.


미술비평이 기술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그 조건이 경제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숙고해야 하는 것은 미술시장이 보여주는 실물경제의 차원만이 경제의 모든 모습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치경제도 있고 문화경제도 엄존한다. 이른바 현대미술과 함께 근대적인 경제학은 발전을 함께 해오고 있다. 앤디 워홀이나 데미안 허스트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된다. 이러한 상품미에 의한 경제와는 다른 정치적 실천으로서 미학을 펼칠 수 있게 하는 장으로서 정치경제가 존재한다. 그리고 삶의 조건이자 형성인 문화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경제에 바탕한 미술도 이 세계를 둘러싸고 있다. 이것들은 미술비평의 대상이 아닐까?


미술비평 / 전시기획

미시경제에 의한 미술시장의 우세함이 미술비평의 ‘하찮음’ 혹은 부수적인 성격을 강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때 재미난 현상이 일어난다. 몇 년 전에 서울 한복판의 유수한 사립미술관의 관장이 사석에서 “왜 미술평론가들이 전시를 기획하죠? 그냥 나중에 글을 쓰면 되잖아요!”하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전시기획 또한 비평행위의 일종이라는 사실을 이해 못했던 것 같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반증은 2009년 아일랜드에서 열려 참석한 국제미술평론가협회 컨퍼런스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평론가들이 앞다퉈 비평의 위기에 대하여 얘기하며 그 탈출구로 전시기획과의 병행을 언급했다. 심지어 큐레이팅은 글쓰기로서의 미술비평보다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한국 현대미술계의 현황을 보면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미술에 대한 기술가(記述家)로서 그 임무를 오히려 잘 수행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상업 화랑의 갤러리스트 또한 텍스트를 생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비평의 부재를 말한다. 어리둥절할 뿐이다. 이렇게 변화를 겪는 데에는 미술 자체의 특성에 기인하는 바도 크다. 근대미술에서 현대미술까지 나름의 역사적 흐름 또는 맥락을 짚으며 미술비평이 관여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대략 서구에서 1960년대 이래, 한국에서는 1990년대 경부터 일관된 해석이 불가능해졌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현상이다. 미술비평보다는 미술이론이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미술계에서 작업 이외에는 모두가 이론이었다. 물론 이것은 정당하지 않다. ‘이론들’은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지난한 현대미술에 대한 사유의 구축으로서 글쓰기가 다른 이름으로 불리더라도 그것은 ‘미술비평’이다.


작년 한 학술 세미나에서 21세기 한국현대미술에 대하여 발표한 적이 있다. 사회자가 논평하기를 너무 시니컬하고 긍정하는 것인지 부정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녀도 미술비평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다. 우리의 비평은 ‘인텔렉츄얼(Intellectual)’하며, 그리고 성급한 단정적 판단이기보다는 반성을 통한 성찰임을! 현대미술의 대중화, 민주화, 상업화, 그리고 문화 등의 이름에서 우리는 행복하기만 한가. 거북스러움을 느끼지는 않는가?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사유하며 살아갈 것에 대한 ‘멘토’로서 미술비평은 작동해야 한다. 오늘날 사유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듯한 ‘사유의 패배’를 용인하는 조류 속에서 미술비평은 자신이 선택한 예술형식에 정통하면서도 동시에 문화 비평이어야 하는데 예술은 살아있는 문화의 날줄과 씨줄을 형성하는 사상, 신앙, 그리고 감정을 위한 주요 통로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미학자이자 평론가인 노엘 캐롤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대개 일반적인 비평이 협의의 미술비평일지라도 모든 예술평론은 그것과 함께 문화비평의 책임과 위험을 회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김병수(1963- ) 홍익대 미학과 석사. 미술평단 평론상 수상.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출판위원장 역임. 현 경기대 미술디자인대학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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