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64)자, 즐거운 미술비평의 시간이다

강수미

‘즐기라’는 말이 말뜻대로 즐김의 능동성이 아니라, 성공을 위한 명령어가 된 지금 여기 한국사회에서 미술 창작과 수용 또한 전혀 자유롭지 않다. 일례로 요즘 사람들은 작가에게 낭만주의 예술관에서나 통용될 법한 ‘내면의 고독과 고통’이라는 시대착오적 환상을 여전히 투사하면서, 동시에 이와 모순되게도 ‘대중성과 오락성’을 작품의 가치평가 기준으로 들이민다. 마치 전자가 스타작가에게서 눈으로 가늠할 수 있는 객관적 지표나 되는 듯이, 후자가 미술이 서비스산업이 된 시대의 당연한 덕목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현대미술에 부과돼 왔던 꽤 오래된 요구, 즉 ‘미술의 대중화’ 혹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는 미술’에 대한 요구를 거의 정언명령처럼 미술비평, 전시기획 등 미술과 관련한 제반 영역에 관철시키고 싶어 한다. 여기서 미술비평으로 폭을 한정해 얘기하자면, ‘미술의 대중화’와 ‘즐김’은 곧 평론가들에게 대중적 글쓰기의 강제로 이어진다. 물론 이때의 강제가 대중과의 공감이나 의사소통 가능성을 평론이 확보하는 차원의 요구라면 넘쳐도 모자란다. 하지만 대체로 그 강제성은 논자의 사적이고 감상적인 묘사를 달콤한 시럽처럼 문장마다 듬뿍 쳐서 독자가 작품 그 자체에도 접근할 수 없고, 현대미술 현장의 실재도 대면하지 못하게 막는 그런 종류의 태만한 글쓰기로 이어진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지난 8월 창간된 미술 월간지 『article』의 2호에서 나는 한 권의 잡지 내부에서 기이하게 분리시켜진 채 갈등하는 미술 관련 글쓰기 또는 비평의 양상을 발견했다. 책은 2호 ‘커버스토리’로 미술평론가 등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17명 미술전문가들만의 철학 또는 편견”을 각자의 글을 수록하는 형태로 조명했다. 다른 한편, 책 말미 ‘서점가는 남자’ 코너에서는 정민영 편집위원이 최근 “미술 대중서 저자의 증가” 현상을 두고, 기자 출신 저자 및 미술 칼럼니스트의 글 vs. 미술이론가 및 평론가들의 글을 비교했다. 앞의 저자들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쓰며 “미술의 대중화와 대중의 미술화에 앞장서고 있다”면, 뒤의 저자들은 “전문성이 강한 반면 소통 가능한 문장력이나 스토리텔링에 기반한 대중적인 글쓰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그 글의 요지다. 정 편집위원은 현재 “일부 미술이론·평론가들의 매끄럽지 않은 글쓰기는 여전히 미술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면서, 과거 문학평론가 김현이 미술비평에 대고 한 쓴 소리를 오늘의 독자에게 환기시켰다. 그가 1985년 「미술비평의 반성」에서 “미술계에는 유감스럽게도 ‘읽을 수 없는 글’이 우세종을 이루고 있다.”고 직언한 내용을. 나 또한 공개적으로든 아니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현의 글들이 내 비평의 일정 부분에 영향을 끼쳤음을 밝혀왔다. 그때마다 위의 글에 담긴 그의 냉엄한 비판이 내 머릿속을 울린다. 동시에 그 문학평론가이자 미술에 관한 글에 한해서는 한 명의 독자였던 김현을 “작문교사의 위치”에 서게 만든 어떤 미술평론의 글쓰기 한계를 생각한다. 즉 문장의 짜임과 서술의 기초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여러 난삽하고 모호한 외래 용어들을 남발하면서도 그것이 무지를 가장한 현학이고 글쓴이의 변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미술비평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25년의 시간이 지났다. 단순히 시간만 간 것이 아니라 현대미술계 전반의 구조와 디테일, 창작과 수용의 양상, 그리고 미술계 인적 구성원의 내부와 외부가 변화했다.


정당한 평가와 온당한 존재의의 확립

국내외의 현대미술은 더 이상 인상파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지 않다. 또 개별 작가와 그들의 작품은 헤아리기 힘들 만큼 복잡다단한 경로 속에서 각자의 형태로 전개되고 있으며, 그 만큼 감상자 또한 기꺼이 그 경로와 전개 형태에 감각적으로든 인식적으로든 참여하는 일을 자신의 미술 향유 방식으로 간주하는 추세다. 그 과정에서 미술평론가나 기획자들은 ‘대중이 좋아할만한 쉽고 재밌는 무엇’으로 획일화된 영역의 대리자로 멈춰있지 않다. 오히려 그 획일성 안에 애매하게 남겨진 대중과 대중성의 정체, 미술의 전달과 공유 가능성을 새롭게 정의하려 하고, 그 형식과 내용을 각각의 수용자들에게 적합한 플랫폼 속에서 매개하는 다중적인 역할을 부단히 창안하려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여기서 과거 미술비평에 대한 김현의 비판이 더는 적확하지도 않고 반성을 끌어내지도 못하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오늘의 한국현대미술비평이 수행하고 있는 일에 정당한 평가를 내리고, 그것에 온당한 존재의의를 새겨주는 일이 필요하다.


나 또한 포함돼 있어 거론하기 조심스럽지만 위에 말한 ‘커버스토리’의 17명 필자들 글만 예로 들어봐도, 오늘의 한국 미술계 일원들은 각자의 글쓰기 역량의 강화에서 시작해 미술이 사회적 삶의 장(場)에서 다른 이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형성하도록 틀 짓는 일까지 실행하려 한다. 그러니 한국의 미술비평에 대고 “읽을 수 있는 글을 써라”(이진숙)라든가 “독자 중심의 글쓰기를 고민하라”(정민영)고 말하는 것은 조금 구시대적 가락으로 들리거나, 현재 발표되는 미술비평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다소간 상투적인 비판으로 울린다.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오늘 한국현대미술의 시간 속에서 누군가들이 새로 만들고 있는 낯선 평론의 언어에는 그만한 이유와 가치가 있다. 우리,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라도 먼저 그것의 진면모가 어떤지부터 보기/읽기로 하자.



강수미(1969- ) 홍익대 미학과 박사. 올해의 예술상-전시기획 부문(2005,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석남 젊은 미술이론가상(2008) 수상. 미학자, 미술비평가.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