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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김홍주, 낯선 회화, 이상한 얼굴

박영택

무제, 1990년대, 종이에 연필, 아크릴릭, 제공: 성곡미술관


좋은 작품은 생경하고 이질적인 감각을 안겨주면서 낯설게 다가온다. 익숙한 감각과 자연스럽게 수용해오던 미술의 관습적인 것들이 와해되고 그 자리에 이해할 수 없고 모호하며 생경한 것들의 혼돈스러움이 안개처럼 밀려든다. 모든 타자와의 접촉이 그런 새로움과 난해함을 안겨준다. 자신이 지니고 있던, 길들여진 관점만을 강제한다면 자기를 벗어나기 어렵고 타자를 불러들일 수 없다. 나는 전시장에서 친절하게 달라붙는 것들을 피하고 너무나 익숙한 어법으로 동일한 것들을 재생산하는 것들을 건너뛴다. 그것은 마치 장애물을 피하는 경주와도 같다. 무수한 복제품을 가로질러 가면서 그 사이에서 코드화되지 않은 어떤 것을 찾으려 한다. 전시를 보는 것은 그런 면에서 살아가는 일과 동일하다. 매순간 규격화된 삶의 틀에서 벗어나야 살 수 있다. 상투형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어제의 나와 다른 나를 밀고 나갈 수 있다. 순간순간 자신을 자각시키고 점화시켜야 굳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수시로 무너지고 경화되기에 이를 경계하기 위해서 매번 자극이 필요하고 낯선 관점, 세계의 다양한 존재면을 보는 눈이 요구된다. 이때 좋은 미술작품이 그 길을 설핏 보여준다. 
 
미술은 이미 존재하는, 너무나 익숙한 어법을, 학습 받은 시각적 관례를 파기하는 데서 자기 자리를 잡아나간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이전의 관점과는 다른 관점을 출현시킨다. 주지하다시피 현대 회화는 주관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의 새로운 얼굴을 그리려한 여러 시도였다. 화가들은 세계를 바라보는 어떤 관점을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하면서 우리에게 무수한 세계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것들을 발견하게 한다. 미술작품은 한 개인의 주관에 의해 들어온 세계의 모습이다. 작가마다 자신의 관점에 의해 발견된, 해석된 세계를 표상한다. 작가가 보여주는 그것이 얼마나 신선하고 흥미롭고 경이적인 관점이냐 하는 것은 결국 작가의 세계관이고 미술에 대한 사유일 것이다. 그러니 한 작품은 세계의 다채로운 얼굴들을 부득이하게 들이민다. 우리는 그 이상하고도 낯선 얼굴과 대면한다. 기존의 코드로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학습 받은 경험들로는 측정하기 애매한, 낯익은 얼굴이 아닌 개념화할 수 없는 어떤 상태로 스물스물 다가온다. 데리다의 해체론에 의하면, 분명한 의미를 갖고 작품의 진리를 완전히 드러내고 있는 예술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은 끊임없는 해석이 일어나는 장소일 뿐이다. 열린 텍스트인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에게 예술작품은 해석학의 대상이 아니라, 개념화될 수 없는 것의 일시적 흔적의 보존이 된다. 

성곡미술관에서 열리는 《김홍주의 드로잉》(3.22-5.19)전시는 규정하기 어려운 회화다. 구상도 추상도 아니고 드로잉과 회화의 경계도 무의미하다. 그저 무수한 선이 집적되어 덩어리를 이루는데 그것이 어렴풋한 형상을 지시하는 듯하다가 다시 선으로 회귀하기를 거듭한다. 물리적인 천에 스민 붓질들은 표면에서 풀처럼 증식해나가는데 그 선/붓질은 그것 자체로 자족하는 충만한 행위가 된다. 무엇을 위해 종속되거나 재현의 덫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고 막연한 질료의 흔적이나 자의식적인 제스처에 함몰되지 않는다. 이 모호하고 애매하기 이를 데 없는 회화가 주는 낯선 감각은 우리에게 그림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프레임에서 벗어난 천은 벽에 바짝 붙어 환영을 증발시키고 회화의 물적 조건을 다시 들여다보게 한다. 동시에 그저 무수한 선, 붓질의 집적으로 납작하게 문질러진 이 그림은 상당히 촉지적인 표면을 일깨우고 있다. 그림을 보는 이에게 다양한 지각을 발생시키고 여러 상상력을 부추기고 화면 앞에서 시선을 헛디디게 한다. 무엇이라고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이 그리기는 그 누구하고도 닮지 않은 이상한 얼굴로 우리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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