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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단과 서단의 소통-장우성과 김충현의 우정

정현숙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시서화에 능한 사람을 ‘삼절(三絶)’이라 불렀다. 이것은 ‘시서화 일치’라는 말과 상통한다. 같은 맥락에서 ‘서화동원(書畵同原)’이라는 말이 있다. 그림과 글씨는 그 근원이 같다는 의미다. 서화동체(書畵同體) 즉 글씨가 그림이요 그림이 글씨다. 글씨의 원형인 상형자는 그 자체가 그림이다. 그래서 ‘글씨를 그린다’라고도 말한다.


해방 후 1946년 서울대에 미술대학이 처음 생겼을 때 일제의 잔재를 버리기 위해서 한국화의 진로로 택한 것이 수묵을 위주로 한 ‘신문인화풍’이었다. 전통문인화풍에 서양화의 기법을 가미한 것이 신문인화의 요체다. 당시의 제1 회화과 즉 동양화과의 교과과정에 서예와 사군자가 들어 있었고, 손재형이 그것을 담당했다. 동양화과의 두 주역 김용준과 장우성은 동양화의 기본은 글씨이고 글씨의 필획으로 그린 동양화의 필선만이 살아있는 그림을 만든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에서 탄생한 명화가가 바로 1기생인 박노수다. 그는 ‘일편단심’을 뜻하는 ‘남정(藍丁)’이라는 호도 서예 선생 손재형으로부터 받았다. 남정그림의 활획은 그의 부단한 글씨 연습에서 나온 것이다. 그림이 경지에 오른 후에도 그는 글씨 연습에 몰두했다. 박노수와 동기인 박세원이 얼마나 글씨에 능했으면 손재형이 서예가가 될 것을 권유했을까. 박세원은 조국의 산하를 그리기 위해서 노수현의 문하로 들어갔지만 그의 글씨는 서예가보다 더 빼어나다.



당시 서가들과 가장 친밀하게 교류한 화가는 현대 한국화단의 ‘삼절’인 장우성(1912-2005)이다. 많은 명서가들 중에서 장우성이 허물없이 지낸 서가는 손재형(1903-1981)과 김충현(1921-2006)이다. 9살 연상인 손재형과는 1933년 김돈희의 상서회에서 처음 만난 후 1981년 손재형이 종명할 때까지 반세기를 서화를 논하고 서화골동 수집의 취향을 나누었다. 9살 연하인 김충현과는 집안끼리의 세의를 바탕으로 돈독한 우정을 쌓았으며, 여러 서화가들과 ‘주유천하(酒遊天下)’를 하기도 했다. 장우성은 생전에 화단에 시서를 논할 사람이 없음을 한탄했다. 그는 김충현과 더불어 화단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시서를 즐겼다. 1990년 장우성이 백악산 아래 큰 집을 짓고 ‘한벽원(寒碧園)’이라 명하니, 그 기쁨을 김충현이 ‘한벽원송’으로 표현했다. 2005년에 한벽원장은 떠났지만 그 노래는 돌에 새겨져 아름다운 한벽원을 지금도 의연하게 지키고 있다. 1998년 예술의전당 10주년 기념으로 ‘일중 김충현(1998.3.7-4.12 예술의전당 서예관)’전이 열렸다. 장우성은 그 전시도록 평문에서 서예가 김충현을 “시문을 갖춘 선비요 도시의 은사(隱士)”라고 했다. 장우성이 떠난 이듬해인 2006년 김충현도 같은 길을 갔으니 아마도 지금쯤 저 세상에서 같이 시서화를 논하고 있으리라.


21세기 한국화단과 서단이 소통 필요

김정희로 대표되는 19세기 조선예술계와 마찬가지로 20세기 초의 근대화단에서도 서와 화의 구별이 거의 없었다. 1911년 세워진 한국최초의 근대적 미술학원인 경성서화미술회에는 화(畵)과와 서(書)과가 있었다. 근대화단의 6대가 중 허백련을 제외한 5대가가 이 미술회의 화과를 수료했고, 그 중 김은호와 이상범은 서과도 수료했다. 다음 세대인 김기창, 장우성도 서를 즐겼다. 특히 장우성은 가학으로 익힌 글씨 솜씨로 1933년 ‘서화협회전’에서 입선한 적이 있으며, 마침내 ‘월전풍’이라 칭할만한 자가풍의 글씨를 이루었다. 이러한 사실이 말해주듯 20세기 후반까지도 서가와 화가가 서로 어우러져 화가는 서를 논하고, 서가는 화를 논하면서 서단과 화단을 허물없이 넘나들었다.


작년 8월경 그 다음 세대의 대표작가 중 한 사람인 임송희의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띤 것이 왕희지 행서의 습작이었다. 비록 그것이 그의 스승들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 또한 그림의 선이 곧 글씨의 필획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서단과 화단의 교류는 전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불통이라 함이 옳을 것이다. 이제 전통과 현대가 만나고 동양과 서양이 만나면서 시공의 경계를 허무는 시대가 도래했다. 서화는 원래 한몸이다. 서단과 화단이 소통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때는 없다. 20세기처럼 누군가가 21세기 한국의 화단과 서단이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길 기대해 본다.



- 정현숙(1957- ) 이화여대 졸업. 원광대 미술학 석사, 미국 펜실베니아대 미술사 박사. 이천시립월전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역임. 현재 원광대학교 연구교수, 한국서예학회와 한국목간학회 부회장. 저서로 『서화, 그 문자향 서권기』, 『삼국시대의 서예』, 『신라의 서예』, 역서로  『광예주쌍집』, 『미불과 중국 서예의 고전』, 『서예 미학과 기법』이 있고, 서화 관련 논문 50여 편을 썼다. 2020년 우현학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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