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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문화와 예술을 잇는 연결고리

이선영

가난과 병마 속에서 고독한 창작을 이어가던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사망을 계기로, 예술인 복지법의 필요성이 수면에 올라와 한 때 문화 예술계 여론이 들끓었지만, 관련법은 아직도 국회통과가 요원하다. 한겨레신문에 의하면, 그 이유가 예술인의 기준이 모호하고 학습지 교사나 택배기사 등, 다른 분야의 근로자와 형평성이 안 맞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술인이 그들보다 더 훌륭해서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학습지 교사나 택배기사도 예술인들만큼 삶의 조건이 열악하다면, 정치인들이 고민해야 하는 것은 그들 앞에 공통적으로 놓인 삶의 한계 상황 아닌가. 열심히 작업, 또는 일을 하고도 지속가능한 삶을 꾸릴 수 없을 때, 그 어떤 직업이든 간에 사회적 관심과 해법이 필요한 것이다. 잠수함의 토끼처럼, 우리가 속해 있는 문화예술의 한계 상황을 폭로하고 스러져간 최고은이 활약하던 영화 분야는 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는, 이미 예술의 영역에도 속하지만 그래도 미술보다는 대중적인 문화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역 작가의 비참한 죽음은 그보다 더 입지가 좁은 미술의 상황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작가에 대한 지원 체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계에 등장한 대형 유통업체가 영화의 종 다양성을 더 축소한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파이가 커지면 윗목에도 따스한 기운이 돌아야 하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다.

대형 영화관은 오늘도 팝콘냄새 찌들은 한 가지 취향을 은연중에 강요한다. 우리에게는 ‘한류’라고 불리 우는 경쟁력 있는 문화가 있다. 그 자체로도 대견하지만, 아직은 다양성이 현저하게 결여되어 있는 한 가지 색깔로 물들어 있다. ‘국제적인’ 안무와 작사 작곡에, 똑같은 화장 빨, 성형 빨로 무장된 세계적 상품으로서 한류는 그 모습이 너무나 기괴하여 각광 받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 분명 엄청나게 노력했을지 모르는 그 살아있는 인형들에 애국주의까지 포장된 모습은 더욱 민망하다. 그것은 정해진 포맷을 최대한 가속시킴으로서 생겨난 경쟁력일 뿐이다. 국제 경쟁력을 가지는 예술이 클래식 분야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규칙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정해진 규칙을 완벽하게 따라가는 것에 강한 우리의 경쟁 풍토와도 무관하지 않다. 스포츠 분야의 강세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우리 문화예술도 이제는 규칙 자체를 만들어가야 하는 시대가 오지 않았는가. 생존의 시대를 넘어서 가히 문화의 시대가 개막 된지도 꽤 되었지만,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예술은 여전히 공공적 관심을 받지 못하고 각개전투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맨땅에 헤딩하고 열심히 파 보지만, 결국은 자기 하나 누울 무덤만 파는 꼴이다. 미술계 현장에서 만난 작가들은 작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기 보다는, 과연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최소한의 사회 안전망으로 예술가가 보호되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못나서가 아니라, 다수가 누리는 문화의 기초를 생산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첨단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과학과도 같다. 기초과학은 당장의 이익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에 의해 보호 육성된다. ‘문화예술’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양자는 등치되기도 하고 명확히 구별하기도 힘들지만, 양자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문화는 소비이며, 예술은 생산이다. 만약 문화가 생산이라면, 그것은 재생산일 것이다. 문화는 문화 소비자에게 위안을 줄 수 있지만, 예술은 병을 더 깊게 할 수도 있다. 문화가 전반적인 생활의 양식이라면, 예술은 그 몸통을 형성하는 줄기세포 같은 것이다. 무엇인가 생산하려면 어느 정도는 소비해야 한다. 미술가가 되기 위해 학원이나 대학을 다니고, 또 다양한 문화적 체험이 필요하듯이 말이다. 레코드를 사서 열심히 음악을 듣는 이가 음악인이 된다. 빵을 좋아했던 사람이 새로운 빵을 만들기 위해 고민할 때 그 사람은 문화에서 예술의 차원으로 접어든다. 문화는 유행처럼 따라가야 하는 것이지만, 예술은 유행의 창조이다. 생산과 소비가 분리불가능하고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지만, 양자의 차이를 인정한 상태에서 동등하게 상호 작용하는 조건을 조성하는 것은 중요하다. 문화와 예술은 양과 질의 관계이다. 어떤 문화가 질적으로 전화되면 예술이 된다. 예술까지 고양되지 못된다면 적어도 예술을 보호하는 층이 된다.

책방 하나 없이 수많은 음식점과 카페, 그리고 미술학원이 점령한 홍대 앞 같은 곳은 ‘문화의 거리’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거기에서 미래의 예술가가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작가가 작업에만 몰두 할 수 있도록 작품이 소통, 또는 유통되는 채널을 합리적으로 구축하는 분야 역시 문화이다. 문화는 수단이고 예술은 목적이다. 계몽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수단은 점차 목적을 억압하고 대체한다. 소통이나 유통을 담당하는 재생산자들이 1차 생산자들 위에 군림한다. 거의 모든 것을 팔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무엇이든 살 수 있지만, 팔기는 더욱 힘들다. 생산자 지옥, 소비자 천국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이다. 대량으로 팔아야 이윤을 남기는 체제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영원한 소비자에 머물기를 바란다. 스펙이나 교양 쌓기에 머무는 지식, 그리고 장식에 머무는 예술은 그러한 체제 순응적인 소비를 부추킨다. 문화적 소비의 예술적 생산으로의 고양은 많은 행운이 뒤따라야 하는 집약된 노력의 결과이다. 문화의 핵심에는 예술이 있지만, 인간이 핵심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문화는 예술이 현실에 직접 닿는 쓰라림을 방어해주는 보호막을 형성한다. 자본주의는 좀 더 체계화 되면서 그 보호막을 점차 밀폐시켜 버린다.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수단의 투명성과 목적의 핵심이다. 문화가 예술로 고양되고, 예술이 문화의 씨앗이 되게 하는 매개 고리가 활성화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문화와 예술은 쓰라린 현실에 맞서 서로를 보호해야 한다.



- 이선영(1965- )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등단(1994), 웹진『미술과 담론』편집위원(1996-2006),『미술평단』편집장(2003-05)역임. 제1회 정관 김복진 이론상(2006), 한국미술평론가협회상(이론부문)(2009)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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