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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가는 세월

박천남

가는 세월
세월 참 빠르다. 요즘 부쩍 그렇다. 입에 달고 사는 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내는 필시 나이가 들고 있음이라고 애꿎은 핀잔이다. 미술동네에서 자주 만나는 20-30대 중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다. 한창 일할 나이, 이런저런 일로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터라 당연 그러할 것이다. 나도 나름 바쁘게 살고 있는 반증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가는 세월이 빠르게 느껴지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하루가 다르게 성숙해가는 아들 녀석의 모습에서 종종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과연 옛말 틀린 것 없다. 자기 늙는 것은 몰라도 남 나이 먹는 것은 아는 법.나이 들면서 잃는 것이 세월이라면, 이렇듯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쁨과 커져가는 삶의 지혜와 용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수확이다. 세월을 아끼거나 거슬러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한 세월을 주름 잡거나 앞당길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세상에 순응하며 돌쇠처럼, 그저 열심히 사는 것도 의외의 ‘똘기’로 가득한 나로서는 답답한 일이다. 이른바 ‘미술인’으로서 그저 조용히 세월을 좀먹는, ‘굳히기 작전’도 스스로 용납이 안 된다. 가는 세월, 오는 세월 속에 현실과 씨름하며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즐거운 일이 많지 않은 요즘이다. 세월에 속아 산다는 말처럼 현재의 삶과 사회가 변변치 못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도 희망을 가지고 오늘을 한층 치열하게 살아볼 일이다.


고(故) 유영국 선생님의 10주기전(5.18-6.17, 갤러리현대 강남)이 열린다는 소식이다. 고인이 되신지 10년이라는 생각에 문득 나의 지난 10년 세월을 돌아보았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너무도 빨리 하릴없이 흘려버린 시간이었다. 앞으로의 10년은 더욱 빨리 흘러가버릴 것이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다. 김대중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 노무현 대통령 등 오래 살아 계셨으면 하는 분들이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나셨다. 미술동네에서도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어르신들이 운명을 달리하셨다. 개인적인 인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중 화가 권옥연 선생님의 생전 모습이 마냥 그립다. 황학동 벼룩시장 끄트머리에 자리한 찌그러진, 허름한 설렁탕집에서 ‘미스터 박, 이거 먹어봐’ 하시며 소 등골을 건네시던 커다랗고 두터웠던, 그러나 누구보다 따스했던 선생님의 손. 고급 우동가게에서 물감이 아예 배어버린 손톱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넉넉한 손이 생각난다. 취흥이 도도하실 때면 일종의 망향가, 가곡 ‘가고파’를 멋지게 부르시던 그분을 이제는 추억 속에서 만나야 한다.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슬픔으로 화면 속에 새를 그리기 시작하셨다던 선생님의 촉촉한 눈망울은 쉽게 잊을 수 없다. 이른바 인명은 재천(在天)이나, 생전에 자주 찾아뵙지 못했음에 그저 송구한 마음이다.

화제의 작가, 유명 미술관만 기억되는 현실
올해로 상수(上壽, 100세)를 맞이한 국내 최고령 원로화가, 윤중식 선생님의 화업 70년을 소개하는 상수전(5.3-6.3)이 서울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조촐하게 열리고 있다. 근처 간송미술관에는 일년에 두 번 공개하는 명품들을 보기 위해 수 천 명이 몰리고 있지만 과연 이곳 성북구립미술관에는 하루 몇 명이나 방문할까? 윤중식이라는 화가를 요즘 젊은 학생이나 작가들은 얼마나 알고 이해하고 있을까? 과연 그런 작가가, 또는 그런 미술관이 있음을 알기나 할까? 주요 서양 작가들의 이름은 물론, 그 어려운 중국 작가들의 이름을 줄줄 꿰면서도 정작 자신이 자라난 한국의, 게다가 자신의 전공과 직접 관련이 있는 근현대작가들의 이름을 상당부분 알지 못하는 학생들과 젊은 작가들의 현 인식세태는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했거늘 심지어 이렇듯 살아계신 원로들도 빠르게 세상에서 잊혀져야 하는 것인가. 동시대 화제가 되는 작가와 유명 미술관만 기억하고 그들을 소비하듯 관람하고 방문하는 작금(昨今)의 관람문화 내지는 학교의 교육문화는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세상이 정말 빠르게 변한다는 생각과 함께 무상함을 느낀다. 도대체 요즘 학교에서는 무얼 배우는 걸까? 커리큘럼에 한국미술사가 I, II, III 등으로 나뉘어져 있는 학교가 얼마나 될까? 아님 한국미술사는 본디 미대 교양정도로 간단히 훑고 지나가는 것일까? 고대 암각화로부터 당대의 영상/설치작업에 이르는, 한국어로 된, 통사로서의 한국미술사도 없는 나라에서 이러한 기대는 지나친 것일까? 한국미술을 해외에 소개하고 대표작가를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의 미술을, 우리나라 말로 기술한 미술역사책이 없음은 실로 개탄할 일이다. 젊은 작가 발굴도 중요하고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작가의 육성과 지원도 필요한 일이지만, 역사적 사실을 꼼꼼하게 기록한 한국미술의 역사와 관련된 책들이 많아야 한다. 그것이 통사로서의 미술사이건, 근대, 혹은 현대, 당대를 세부적으로 다루던 말이다. 가까운 예로 중국의 책방을 가보라. 자국어로, 심지어 영어로 출판된 통사, 당대미술사, 각 장르별 미술이론 서적이 얼마나 다양하게 제대로 빵빵하게 만들어져 있는가를... 자국은 물론, 전 세계로 공급되고 있는가를... 서두를 일이다.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박천남(1961- ) 홍익대 미학 박사. 한국큐레이터협회 부회장 역임. 현 성곡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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