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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작업과 학업 사이에서

이선영

미학에서 숭고와 미의 대조는 진리와 자유가 하나일 수 있다는 고전적 사고에 균열을 일으킨다. 어느 시대보다 균열이 많은 시대지만, 예술의 목적이 ‘진리의 재현이 아니라, 자유의 제시에 있다는 것’(칸트)은 여전히 중요해 보인다. 자유의 제시가 예술의 편에 있다면, 진리의 재현은 학문에 속할 것이다. 미학 수업에서나 나올 법한 말을 여기에 인용하는 까닭은, 지금 여기의 미술현장에서, 진리의 재현에 대한 지향이 강하게 감지되기 때문이다. ‘진리-재현-미라’는 겉보기에 그럴듯한 일련의 가치는 현대미술의 출발선 상에서 이미 의심되어온 것들이지만, 이 땅의 많은 ‘현대미술가’들이 내심 추종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문제는 진리가 돈의 진리가 되었다는 것에 있고, 재현이 지배적 가치에 적합한 의미만을 인정하는 것에 있고, 미가 주어진 한계에만 너무 충실하다는 점에 있다. 현실 안주라는 매개 고리로 묶일 수 있는 ‘진리-재현-미의 추구’라는 단일한 흐름에 균열을 낼 필요가 있다. 미학의 범주로 표현하자면, 진리 대신에 자유에, 재현 대신에 제시에, 미 대신에 숭고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단은 자본과 노동력에 기대어 지배적 질서의 단편을 물신화하는 작품 형식이 여전히 많다는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들이 자신의 활동에 우선순위를 두는 가치 기준이 전도되었다는데 있다. 

 

 

 

학교에 저당 잡힌 자유롭지 못한 예술가적인 삶
경쟁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더 많은 ‘스펙’이 요구되는 젊은 작가들은 이미 시스템의 피해자인데, 이러한 비난은 억울할 법도 하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필요를 넘어서는 시스템의 과도한 요구는 현실 적응과 안주를 위해 하나둘 투항하면서 더 강하게 작용한다. 시스템의 압력을 무시할 사람은 무시하면 시스템은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그렇다고 미술계 현장과 가까워지지 않은 많은 작가들에게 이러한 유혹과 투항은 쉽게 일어난다. 믿는 구석을 향한 여린 마음과 나름대로의 기득권을 완성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이러한 선택을 돕는다. 무엇보다도 누구나 다 그렇게 하니까, 그것이 대세이니까. 그 어떤 직업보다도 자유로울 것이라 기대되는 예술가적인 삶은 학교라는 유일화 되다시피한 세계에 저당 잡혀있다. 학교와 친해지기 힘들었던 필자로서는 청년기 이후에도 학교만 바라보는 작가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학교는 작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필요한 여러 세계 중의 하나로 상대화될 필요가 있다. 필자가 이러한 편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작업과 박사 논문 쓰기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예를 많이 발견하지는 못했다는 점에 있다. 본격적인 학술 가치를 생산하기보다는 대부분 자기 작품에 대한 논문인데, 논문이 가능할 만큼 작품을 열심히 했는가의 문제를 생각해 볼 때 특히 그렇다. 

  

작업에의 헌신
논문 때문에 붓을 놓지 않으려면 보다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 작가들도 많이 보지 못했다. 필자가 만난 젊은 작가들에게서 파악한 그들의 고민 중의 하나는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학업 때문에 작업에 공백기가 생길 수도 있다는 점에서 작업과 학업이 갈등을 빚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진정 ‘스펙’을 중시하는 작가들에게 권고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성향이나 환경 등을 고려하여 빨리 선택하라는 것이다. 단지 어떤 직함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진정 작업과 학업이 서로 상승 작용을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이들만 학교에 적을 두면 된다. 한번 끌려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최초의 용인이 그 다음의 용인으로 이어지고 본래의 동기는 희미해진다. 이미 이름 붙여지고 자리잡힌 것만 인정하는 태도가 예술에는 얼마나 적대적인가. 예술은 확립된 질서가 아니라, 경계 위에서 지배적 규칙 바깥의 것들을 끌어들이려는 근본적인 지향이다. 이러한 지향은 자잘한 계산을 넘어선 절대적 헌신을 요구한다. 이미 많은 헌신이 있어왔지만, 결론은 지배적 시스템에만 헌신하지 말고 작업에 헌신하라는 것이다. 작업에의 헌신은 최소한 스스로를 소외시키지는 않는다. 



- 이선영(1965- )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등단(1994), 웹진『미술과 담론』편집위원(1996-2006),『미술평단』편집장(2003-05)역임. 제1회 정관 김복진 이론상(2006), 한국미술평론가협회상(이론부문)(2009)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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