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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퍼포먼스에 대한 반성과 제언

장석원

2012 광주비엔날레 오픈 무렵에 국제미디어퍼포먼스아트페스티벌(9.6-9) 행사가 벌어졌다. 작가 김광철이 기획, 조직한 행사로 16개국 50여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한국의 성능경, 조용신, 류환, 문재선 그리고 에스토리아의 논 그라타 그룹, 미국 아멜리아 윙거, 폴란드 아르티 그라보프스키, 일본 아라이 신이치, 중국 카이 칭 등이 참여했다. 광주 예술의 거리 궁동 예술극장의 옥상에서 펼친 논 그라타 그룹의 작업은 파격적이고 선동적인 면에서 압권이었다. 불꽃을 일으키며 복면을 쓴 채 확성기로 세상을 바꿔라 등을 외치는 남자와 불꽃에 쇠를 달구어 웃으면서 이를 남자의 팔에 각인하는 흰 속옷 차림의 여성, 그들은 분명 스펙타클한 효과에 정통한 행위자들이었다. 관객의 반응에 너무도 익숙한 그들의 행위는 이미 공식화된 의례를 치르는 것처럼 상투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쇼와 예술, 볼거리와 의미 등을 다시 생각케 하는 장면이었다.

 



퍼포먼스는 공연이 아니다

퍼포먼스는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 이 행사에 참여했던 상당수의 한국 작가들은 퍼포먼스가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 연극적 행위나 무용 같은 공연이 펼쳐지기도 한다. 미술로서의 퍼포먼스는 그 뉘앙스 자체가 다르다. 이에 대한 진지한 고려 없이 관객에게 뭔가 보여주기 위한 행위라면 그 본질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미술로서의 행위는 연극의 그것처럼 연습이나 대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또 무용처럼 음악에 맞춰서 아름다운 행위를 펼칠 필요도 없지 않은가? 퍼포먼스 즉 공연이라는 일반적 인식 때문에 이러한 착오가 생기는 모양이다. 외국 작가의 경우도 부분적인 문제가 항상 제기되었다. 아라이 신이치의 경우처럼 일본의 극우에 대한 비판으로써 자신의 궁둥이로 검은색 일장기를 만들고 원전에 관련한 책을 찢어 삼키면서 그 극단까지 자신을 몰고 가는 행위, 정치 사회적 문제 제기에 자신의 행위나 신체성을 도구로 사용하고 끝난다. 그러나 그 정치성 및 사회성은 답이 너무 빤해서 싫증이 난다. 폴란드의 아르티 그라보프스키는 권투 선수 출신으로 사물을 파괴하며 자신의 구두에 못질하는 등 아슬아슬하고 끈질긴 행위를 지속시킨다. 결과적으로는 승리감을 느낄 만한 어느 장면을 연출하기 위하여. 그 프로세스가 예술로서 한 부분을 건드릴 수 있었다면 감동은 배가되었을 것이다. 국내외의 많은 작가들이 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문제에 강박 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볼거리에 집착하면 할수록 퍼포먼스는 쇼가 되고 만다. 보여주는 문제와 보여주지 않는 문제가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술적 또는 철학적 또는 정신적 이유로 그것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배면에 미술로서의 퍼포먼스라는 근거가 성립되는 것이다.

 

 

 

물론 예술로서의 퍼포먼스도 볼거리를 제공할 필요를 느낀다. 성능경이 헬스장 운동복 차림으로 줄넘기, 체조 등을 하다 말고 고무줄총으로 메시지가 담긴 탁구공을 관객을 향하여 발사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시종일관 일상, 놀이, 볼거리이면서 동시에 삶이 곧 예술이고 놀이 안에 사유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볼거리와 예술성은 모순되지 않는다. 뉴욕에서 온 아멜리아가 롯데갤러리에서 여성 관객들을 불러모아 둥그렇게 어깨동무를 하고 행진과 함께 ‘아~’하는 소리를 점차 키우면서 하나가 되었던 것은 단순하지만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하였다. 한순간에 아무런 연고 없었던 여성들이 단순하게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성 공동체적 사회성은 실재하고 있다.
 


장석원(1952- ) 홍익대 서양화과 석사.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 역임. 현 전남대 미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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