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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좋지 않은 인플레이션 시대의 미술

이진명

나는 일당 7만 원어치의 일만 하면서 사는 삶을 즐긴다. 열심히 시간강의를 하고 가끔 들어오는 서문이나 기타 리뷰를 쓰고 나면 월 210만 원 정도가 모인다. 7만 원에 30일을 곱하니 딱 그 정도 양이 산출된다. 이보다 많을 때도, 적을 때도 있지만, 아무튼 하루에 7만 원 이내로 소비하려는 심리가 의식적으로 정해져 있다. 그 이상을 쓰면 수입이 바닥나겠다는 조바심과 두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유적자아나 안빈낙도 같은 중국말을 위안 삼아 스스로 최면을 걸면서 사는 인생이다. 하루에 택시 타고 밥도 먹고 책 한 권 살 수 있고 영화도 한 편 보니 얼마나 행복한 인생인가. 그런데 언제나 술이 문제다. 술은 자기 통제력을 상실시킨다. 전두엽이 잘 취하는 사람은 말이 많아지는 경향이 있고 측두엽이 취하는 사람은 잘 운다. 소뇌가 취하는 분들은 그냥 주무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겁(怯)을 없앤다. 겁이라는 한자를 들여다보면 마음이 가버렸다는 뜻이다. 동양은 이성과 감정을 따로 구분하지 않으니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뇌가 가버렸다는 뜻이다. 술을 먹으면 일상의 평정심을 초월하게끔 된다. 욕망이 발동된다. 욕망이 발동되는 것을 나는 욕동이라는 말로 만들어 표현하길 좋아한다.


욕동이나 욕망은 자본주의를 이끌어가게끔 만들어주는 근본적 수레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경제관념이 빵점인 사람이다. 하루 7만 원을 초월해 살면 불안해서 못 견딜 사람이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이를 초월해서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세상이 욕동을 부추기는 세련된 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그것이 부채이다. 한강변의 고급아파트들이나 기업과 관공서의 화려한 건물은 서울이 아름답다고 느끼게 한다. 더군다나 와인을 마시는 여인들의 모습이나 세련된 감각의 강남의 젊은이들을 보면 나로 하여금 여기가 외국보다도 오히려 이질적이게 느끼게 한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하루에 7만 원을 벌어서 5, 6만 원어치만 사용한다는 알뜰함의 철칙이 낄 자리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이 부채인 것이다.


“문제는 경제야, 이 멍청이들아.” 이 말은 92년도 클린턴을 대선에서 승리시킨 일등공신의 슬로건이었다. 그다음부터 경제를 통한 인기주의적 대중영합정책이 각국의 상식처럼 굳어졌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부터 경기부양을 위해 선진경제국들은 통화공급을 너무나도 늘려왔다. 인플레이션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 인플레이션이란 좋은 인플레이션이 있고 나쁜 인플레이션도 있다. 좋은 것은 초과수요 인플레이션이고 나쁜 것은 비용인상 인플레이션이다. 초과수요란 수요가 공급을 앞서는 것을 말한다. 당연히 물가가 상승하면서 GDP도 상승한다. 집을 사려는 사람이 파는 집보다 많을 때이다. 은행부채를 써도 부채의 이자는 고정되어있고 인플레이션으로 통화의 가치도 떨어지니 이자의 부담이 적은 경우다. 더구나 집값이 치솟는다. 앞서 이야기했던 강남의 멋진 젊은이의 감각은 이러한 운 좋은 호시절의 영리한 부모님을 만난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반면에 비용인상 인플레이션이란 석유, 철강, 구리, 펄프, 고무, 밀가루, 옥수수 등 원자재 상승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다. 이때 인건비 상승은 동반하지 않은 채 상품가격만을 조장해서 서민생활의 이중고는 가속화된다. 현재 상황이 이러한 상황이다. 그리고 그 원인을 중국, 브라질, 러시아 등 신흥공업국, 그중에서도 중국의 부상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영국의 철강회사 코러스(CORUS)가 신일본제철 때문에 기울었고 신일본제철은 포스코 때문에, 그리고 포스코는 중국제 바오샨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위기감이 우리에게 내재되어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쁜 인플레이션의 원인은 중국의 부상 때문이 아니라 세계 경제체계에서 공급이 이미 과잉 포화상태에 이르렀다는 데 있다. 공급이 포화상태에 이르면 기업과 소비자들은 소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미래를 설계한다. 기업의 소비 줄이기와 부채 줄이기는 생산시설투자의 실종을 부추기고 이에 따라 중소기업이 망한다. 이에 따라 청년백수는 늘어나며 이 백수들을 부모들이 먹여 살려야 하니 부모들 씀씀이를 더욱 줄일 수밖에 없다. 내수는 꽁꽁 얼어붙는다. 아니 냉각된다. 내수가 부족하니 경기침체는 더욱 가속화된다. 이를 ‘디레버리징의 역설(The Paradox Of Deleveraging)’이라고 한다. 그러니 희망이 없다. 그렇다고 희망이 없다며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는데 기업에서도 묘안이 없다. 그런데 얼마 전 이건희 회장이 예술적 경영을 하라고 말했다. 신적 경지의 경영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예술을 경영에 활용하라는 방안이다. 작가 백남준도 오래전부터 “공급이 수요를 초과할 때가 분명히 온다. 문제는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것, 즉 예술할 줄 아는 나라가 잘 산다”라는 말을 했다. 이 신적인 두 양반의 예측은 지금까지 놀랍도록 맞아떨어져왔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우리는 예술계 언저리에서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나는 92년도에 클린턴이 썼던 슬로건으로 현재의 우리 예술계에서 각성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술전시나 예술가와 기업간 매칭 프로그램을 통해서 기업의 이미지를 바꿔주고 경쟁력을 북돋워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술계의 진정한 실력이 요구된다. 그 실력이란 반짝반짝하는 단편적 아이디어나 능란한 혀놀림의 사기가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에 사통팔달한 인문적 교양이 서로 어울려진 창신적 비전을 말한다. 메세나라는 말이 유행되고 화두인 모양인데, 기업으로부터 돈이나 뜯어야지 하는 마인드로 페이퍼 플랜을 짜는 일은 이 어려운 시대에서는 중범죄가 된다. 진심을 다해서 도와주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병든지 이미 오래다. 그리고 그것을 치유하고 싶은 마음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회자되곤 한다. 이른바 자본주의 5.0의 패러다임은 ‘쿨(Cool)한 보수주의’라고 한다. 민간부분에서 자발적으로 피어나는 공공성과 공익적 기능 없이는 시장경제가 발생시키는 사회 경제적 근원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의식이 바로 그것의 모토이다. 그런데 공익적 기능의 산출은 예술적 감수성과 예술적 소통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예술계 사람들의 진정성 있는 분발이 더욱 요구되는 이유이다. 자기가 좀 뜨려고 같은 예술계 사람을 먹이 삼아 팔아넘기는 짓일랑 그만 지양하고 진짜 실력을 쌓을 때이다. 어느 잡지를 보니 얀 파브르나 아니쉬 카푸르, 심지어 숀 스컬리와 같은, 이름만 들어도 즐거운 전시 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 어려운 시절에 어떻게?’라는 생각이 스쳐 간다. 그림을 쉽게 팔 수 있는 시절은 조만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한국 예술계가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기도 하다’고 믿는다.

 


이진명(1974- ) 홍익대 미학 석사. 갤러리아트사이드 큐레이터, 베니스 비엔날레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역임. 현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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