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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잭슨 폴락과 디지털건축

이경훈

잭슨 폴락의 흩뿌리기(Dripping) 회화는 현대 디지털건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연결이 다소 느슨해 보이지만 그 배경은 흥미롭다. 



20세기와 21세기의 건축을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은 디지털건축이라는 새로운 방법이다. 건축에서 컴퓨터가 사용되는 것은 별로 새로울 것이 없지만 디지털건축은 컴퓨터의 활용이 보조적 수단에서 건축의 기본적인 형태를 생성하는 주된 역할로까지 확장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전의 건축, 특히 20세기 건축에서 형태는 건축가라는 존재가 합목적적 의지를 바탕으로 그려내는 형태와 공간이 역사적 예술적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 일종의 영웅주의적 관점이었다. 이는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다중의 힘이라기보다는 특출한 소수의 영웅이 있고 그들의 능력에 따라 역사가 진보한다는 태도일 것이다. 20세기를 대가(Master)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 그리고 대가의 작품들이 일종의 원형이 되어 세계 각지에서 복제된 것은 이런 관점의 결과이다. 그러나 디지털건축에서 건축가는 단순한 조정자의 역할에 머무르게 된다. 다양한 정보를 입력하고 컴퓨터가 스크립트(Script)를 실행해서 발생하는 형태를 건축의 시발점으로 삼는 것이다. 건축가는 형태를 미리 예상할 수 있고 조정할 수는 있지만 임의적 우연 또한 발생할 여지가 많아진다. 그 결과로 건축가가 세부적으로 형태를 통제하지는 못하지만 의외로 손으로 그려낼 수 없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태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에 대해 건축계의 반응은 새로운 기술이 도래할 때마다 되풀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환호와 무시 또는 냉대로 나눠진다. 대표적으로 건축비평가 케네스 프램톤(Kenneth Frampton)은 디지털건축을 컴퓨터 가상공간에서의 형태의 공허한 유희로 폄훼한다. 건축은 물리적 실체이며 즉물적인 구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건축을 옹호하고 이를 통한 건축의 진보를 믿는 이들은 텍토닉한 건축과 다를 바 없는 디지털건축의 존재를 증명하고 그 건축적, 예술적 정합성을 주장하는데 힘을 모은다.



두가지 논지 내용

그들의 논지는 대개 두 가지인데 첫째는, 건축적 논리를 보강하는 것으로, 그 바탕에는 역사를 통해 건축의 형태를 발전시키는 것은 건축가의 영감이라기보다는 기술적 진보가 형태에 자연스럽게 수용되는 과정이라는 논리다. 예를 들면, 좀 더 큰 공간을 구축하기 위해 고안된 아치가 후일에는 장식적인 의미로 기호화되는 과정이 그것이다. 그리고 디지털건축은 이러한 기술과 건축의 공고한 역사적 관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모더니즘 또는 인접 예술분야와의 유사점을 찾아내어서 그 예술적 가치의 동등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촌격인 디지털아트 보다는 모더니즘의 완성된 형태로서 추상회화에서 그 답을 찾아낸다. 여기에서 추상표현주의 특히 잭슨 폴락의 흩뿌리기 회화가 중요한 참조의 대상이 된다. 그의 회화가 붓을 들고 그리는 대신 물감을 뿌리는 기법을 통해서 역사적 선례나 자연주의적 흔적을 배제한 순수한 형태로 완성되었다는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주장이 다시 강조된다. 디지털건축가들은 그의 회화가 일종의 스크립트를 반복하여 실행한 결과이며 일정한 정도의 우연과 통제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는 주관배제적 기제를 통하여 형태를 생성하는 디지털건축이 폴락이 완성한 반자연 즉 추상의 회화와 동등한 의미를 갖는 지점이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역사적, 예술적 정합성, 그리고 건축에서의 순수한 모더니티를 완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건축에서 모더니즘이 그 내적 논리라기보다는 세계대전 등의 사회변동에 따른 종속적 결과라는 논쟁이 있었던 점에 비추어보면 그 의미는 더욱 깊다고 할 수 있다. 


둘 간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폴락이 우연과 우연의 통제를 통해서 전통적인 이미지를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디지털건축은 이를 통해 형태를 생성한다는 점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폴락의 그림이 ‘알코올중독자의 광기의 표출’에서 ‘가장 완성된 형태의 추상회화’라는 극단의 평가를 오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디지털건축 또한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전개가 자못 궁금한데, 현대미술사가 답을 줄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이경훈(1963- ) 뉴욕 프랫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건축사자격증(미국, 한국)을 취득했다. 프랫인스티튜트, 국민대, 경희대, 홍익대 등 강의, 현 국민대 교수이며 건축가이자 건축평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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