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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집이 있는 그림들

박성일

나는 집이 있는 그림을 좋아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도 좋아한다. 그의  외모와 체격에서 첫 인상을 받아, 목소리와 대화를 통해 내면의 구성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 비슷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조금씩 다른 내면의 세계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흥분을 일으킨다. 사람은 눈빛과 짧은 인사말을 통해서도 만날 수가 있다. 그런데 집은 그렇지 못하다. 도시와 시골길에서, 잡지의 사진 한 컷에서 만나는 집들마다 풍기는 느낌과 상상을 자아내는 이미지들이 있다. 그러나 확인 할 길은 거의 없다. 초대받아 방문해 보지 않는 다음에는. 그래서 나는 집이 있는 그림을 좋아한다.

 

화가에게는 작은 집이 좋다

내가 방문할 수는 없지만 외부에서 보게 된 집의 내부세계는 내가 새롭게 만들어내는 이야기로 채워진다. 공간이 그 속에 거주하는 사람을 만들어 낸다. 넓고 높은 집에서는 어차피 그 공간의 주인들에게 많은 산소와  넒은 시야를 제공함으로써 흥분과 희열 그리고 높은 자존심을 허락하고 더 나아가 교만과 오만을 덤으로 제공할 가능성이 높다. 작고 낡은 집에서는 주인의 인내심과 침착, 공간이 허락하지 않는 광대한 세계를 그의 마음과 내면세계에서 만들 수밖에 없는 운명을 보게 된다. 그 속에서 상상력은 생존의 필수 조건이 된다. 그래서 나는 작고 허름한 좁디좁은 공간에서 작업하는 화가들을 좋아한다. 그들의 견딜 수 없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캔버스에 고스란히 그려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넓은 집이 서양의 집이라면, 작은 집은 우리 동네에서 쉽게 만나는 집이다. 



욕망이 갇혀있는 집

몸을 주로 그리는 작가인 에곤 쉴레(Egon Scille, 1890-1918)의 집 그림은 드물다. 그는  사람의 몸이 만들어 내는 격한 포즈를 통해 내면을 드러내는 표현주의 작가이다. 대부분 옷을 벗겨 평생을 걸치고 살아야 하는 허위와 위선을 덜어내려 했다. 이러한 작가가 벗길 수도 뒤틀기도 애매한 집을 그렸지만 외부에서 보여 지는 집을 통해, 누구도  방문할 수 없는 내부 공간과 그 속의 인물들을 상상하게 해준다(<Single Houses>, 1915). 뾰족한 지붕들의 행렬에서 날선 지성을 보게 되고, 여러 곳에 열린 창들이 있지만 좀 체로 들여다 볼 수 없다. 그 속에 있는 사람들만 집 덩치에 비해 작은 창을 통해 자유와 해방을 소망하는 느낌을 준다. 작게 흩어져 있는  붉은 색 창과 중앙의 붉은 벽은 차단된 내면의 욕망이 꼼짝 없이 갇혀있는 느낌이다.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집과 사람 

이에 비해 한국의 화가 장욱진(1918-1990)의 집들에는 자신들의 욕망을 비워놓은 사람들이 앉아있다. 사람과 집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있다. 게다가 집에 앉아 있는 사람의 내면까지도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집이다. 집을 사랑한 화가로 불리고 싶어 했다는 장욱진 화백은 ‘집은 이상의 공간이자 현실의 삶 속에서도 애착의 공간’이라 했다고 한다. “표현이 쉽고도 어려운 것은 자기를 내려놓는 고백이 되기 때문이다.” 라고 한 장욱진 화백의 말 속에서 그림과 사람과 집이 하나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박성일(- ) 대전 박성일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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