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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살아 숨 쉬는 그림

정찬주

오늘은 최쌍중 화백과 이호중 화가가 그린 그림에 얽힌 얘기를 하고 싶다. 두 화가 모두 불행하게도 일찍 타계한 서양화가들인데 나는 최쌍중 화백을 형님, 이호중 화가를 동생이라고 불렀다. 내 집필실에는 최쌍중 화백의 그림 1점과 이호중 화가의 그림이 4점 걸려 있다.


최쌍중, <법성포 초가>


최쌍중(1944-2005) 화백의 화실이 낙원동 상가에 있을 때였다. 나는 그 무렵 『월간문학』기자로서 표지그림을 청탁하러 ‘최쌍중 화실’을 찾았던 것이다. 창이 없는 탓인지 어두컴컴했다. 화실이라기보다 창고 같았다. 남루한 살림살이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어 표지화 고료라도 많이 드리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 내 모습이 좋았는지 최 화백은 법성포 해변의 초가를 그린 표지화를 내게 선물하며 자주 만나자고 했다. 훗날 최 화백이 세검정 집에서 신장투석을 하며 사투를 벌일 무렵이었을 것이다. 문병 간 내게 진심으로 한 마디 했다.


“자네는 쉴 줄 알아야 하네.”


그림 하나에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지며 살아온 최 화백의 회한이기에 가슴이 먹먹했다. 참으로 쉬어보지 못한 사람의 후회였다. 지금도 최 화백의 그 말이 귓가에 맴돌 때가 있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화두가 돼버린 것이다.


이호중, <딸기와 나비>


이호중(1958-2010) 화가는 내가 가장 사랑했던 후배다. 그와의 만남도『샘터』 표지화 청탁이 인연이 됐다. 이호중은 최쌍중 화백에게서 추천을 받았었다. 그에게 부탁한 표지화는 딸기밭의 이슬을 머금은 딸기 그림이었다. 손놀림이 빠른 그는 며칠 만에 멋지게 그려왔다. 표지화로 나간 딸기그림은 예상대로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고, 그는 또 한 점을 더 그려서 내게 선물했다. 이불재 식당벽에 걸린 작품이 그 그림이다. 식사를 하기 전에 딸기 그림을 한 번 보게 되면 입안에 침이 돈다. 그만큼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호중은 내게 돈을 빌려달라는 말도 직설적으로 했다. 그가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을 때였다. 이호중은 부인과 아들을 국내에 두고 훌쩍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버렸다. 이호중이 선택한 대학은 러시아 최고의 미술대학 중 하나인 레핀아카데미였다. 이호중은 레핀아카데미를 다니면서 재학생들 중 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재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생활비와 학비였다. 하루는 이호중이 내가 근무하는 샘터사로 찾아왔다. 용건은 내일 러시아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말 않고 월급의 절반 정도를 가불해 이호중의 손에 쥐어주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호중은 나를 찾아와 빚을 갚아야 하는데 형편이 어렵다며 하소연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부자가 되면 갚으라고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 사실 나는 받지 않겠다는 뜻을 에둘러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자 이호중은 반드시 갚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할 수 없이 나는 내 지갑 속에 넣고 다니는 사진속의 인물을 그려달라고 말했다. 사진 속의 인물은 내 아버지였다. 이호중은 한 달 만에 초상화를 그려왔다. 지금 거실에 걸린 그림이 바로 이호중이 그때 그린 초상화다. 그런데 이호중은 내 아버지만 그린 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어느 날 내 어머니 사진을 달라더니 어머니 초상화를 마저 그려서 가져왔다. 내게 그림을 건네주면서 아버지 초상화보다 마음에 든다며 개인전을 할 때 빌려 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어찌나 실감나게 그렸는지 아버지가 옆에 살아계신 듯하고 어머니가 내게 말을 걸 것 같은 느낌에 휩싸인 순간이 한두 번 아니다. 정성을 다해 그린 그림이란 죽어 있지 않고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화가가 마음으로 그린 그림에는 사라지지 않는 불멸의 혼이 깃들어 있지 않나 싶다.



정찬주(1953- ) 샘터 편집부 부장 및 출판부 차장 역임. 제23회 동국문학상(2010), 화쟁문화대상 (2011) 수상. 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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