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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그림 속에는 추억이 살고 있다

김영종

혹자는 내게 묻는다. 그림을 잘 그리느냐고...구청장이라는 직함을 갖기 전에 건축가로 활동하며 크고 작은 건물들을 많이 지었으니 당연히 그림을 잘 그리지 않겠느냐 지레 짐작하는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나의 답이다. 물론 건축가이면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 재능의 문제일 뿐. 건축도 하나의 예술 장르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림 실력보다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더 중시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그림을 썩 잘 그리지도 못할뿐더러 미술작품에 대한 관심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그러나 문화1번지 종로구의 구청장이 되고 나서는 부암·평창동 일대 미술관들의 전시를 자주 접하게 되었고, 특히 외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을 때면 요즘은 미술관에 꼭 들른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그림에 대해서 조예가 깊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미술작품을 접하면 마음이 동요하는 것이다.


박노수, <달과 소년 (The Moon and Boy)>, 화선지에 수묵담채, 1987년, 66 x 135 cm.


<달과 소년(少年)>이라는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도 그러했다. 이 그림을 보았을 때, 나는 나의 유년시절을 떠올렸다. 그림 속 소년은 먼 곳 저편에 시선을 두고 있고 상념에 잠겨있는 듯하다. 말은 소년과는 반대편 쪽을 향해 있으며, 하늘에는 가느다란 달이 떠 있다.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나는 그림 속 소년이 꼭 어린 나의 모습인 것만 같다. 논밭을 매고 꼴을 베다 잠시 쉬며 휘파람 불던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이 그림을 남긴 분은 바로 ‘남정(藍丁) 박노수 화백’이다. 남정  선생의 그림에는 홀로 선 선비(소년), 산수, 말, 백로, 사슴 등이 주로 등장하고 산이나 수목, 괴석 등 자연물이 화면을 채운다. 서양문물의 침투 속에서도‘우리 것’을 찾아 한국화의 정체성을 모색했던 선생은‘쪽빛’을 바탕으로 한 수묵담채화를 주로 그렸다. 생전에 선생은 이른 아침 화실로 출근해서 해가 질 때까지 작품에 몰두하고 잠시 쉴 때에는 수석과 화초를 돌보며 자연과 함께했다고 한다.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생사라’ 자연 안에서 안온함을 느낀다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그래서인지 그 분의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고향에서 자연을 벗삼아 지내던 유년 시절의 추억이 한 장면, 한 장면 스쳐 지나간다. 특히, 이 <달과 소년>이라는 작품을 볼 때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설렘이 마음 속에 가득 차오르면서 삶의 활력과 위안을 얻곤 한다.


이 그림과의 인연은 종로구청장으로 당선된 지난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민들에게 인사를 전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인왕산 자락 아래 옥인동을 찾았을 때, 박노수 선생을 처음 뵙게 되었다. 화백께서 평생 천착해 온 화업 전부와 40여 년 동안 거주하며 가꿔온 가옥 및 정원, 그리고 소장해 온 다양한 고미술·골동품 등 1,000여 점을 모두 수 십 년간 살아온 종로구에 기증하여 주신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렇게 좋은 작품들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 더욱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종로구는 지난해 9월 서울시문화재자료 1호인 박노수 가옥에 ‘종로구립박노수미술관’을 설립했다.


안타깝게도 선생은 미술관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끝내 눈을 감으셨지만 그가 남긴 흔적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안식을 주고 있다. 박노수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가 미술전문가는 아니라 화풍이나 기법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전언을 들으면 색이 정말 아름답고 맑다고 하기도 하고 노 화백의 숨결이 느껴져 마음이 뭉클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감동과 따뜻함을 다시 느끼고 싶어 재방문하는 관람객이 많은 것을 보니 확실히 그림은 머리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임에 틀림없다. 마음에 와 닿는 그림이 있다면 가만히 들여다보자. 기억 속 어딘가의 추억들이 행복함으로, 즐거움으로, 그리움으로...천천히 다가올 것이다.



김영종(1953- ) 서울산업대 건축공학과, 한양대 대학원 행정학박사,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 초빙교수 역임. 한양대 공공정책(행정자치)대학원 겸임교수,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 심의위원. 민선 5,6기 종로구청장. 저서『건축쟁이 구청장하기』(2012년, 희망제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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