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68)강진에서 만나는 유배객의 내면 풍경, 다산의 <매조도>

이광표

유배(流配)! 참으로 가혹한데도 때론 낭만적으로 다가오는 말. 종종 스스로를 유폐하고픈 욕망이 엄습할 때,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 떠오르고 남도 땅 강진이 아른거린다. 강진은 참 좋다. 유배객 다산이 지냈던 사의재(四宜齋)에서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고, 시인 김영랑의 생가에서 댓바람 소리에 기분 좋게 취한다. 바다에 넘실대는 청자의 비색(翡色)을 탐하고, 무위사 극락전에 이르러 전통 건축의 겸허함에 정신이 번쩍 든다. 어디 이뿐이랴. 백련사 찻집 만경다설(萬景茶說)에서 바라본 배롱나무, 그 너머로 펼쳐지는 강진의 바다….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


강진의 매력이 허다하지만 그래도 핵심은 다산이 아닐 수 없다. 백련사에서 다산초당(茶山艸堂)으로 넘어가는 아늑한 산길. 다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길을 두고 소설가 한승원 선생은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했다. 나는 이 길에 들어서면 다산의 그림이 떠오른다. <매조도(梅鳥圖)> 다산이 그림을 남겼다고 하면 의아해하는 이가 적지 않겠지만 다산은 단정하고 소박한 작품을 종종 그렸다. 강진 유배 생활 13년째인 1813년 여름, 다산초당으로 부인 홍 씨가 해진 치마를 보내왔다. 다산은 그 비단 치마폭 위에 그리움을 흠뻑 담아 그림을 그렸다. 매화꽃 핀 나뭇가지에 참새 두 마리…. 그림은 단순하다. 다산은 그림 아래쪽에 시 한 편을 적었다. 


翩翩飛鳥 息我庭梅 有烈其芳 惠然其來

爰止爰棲 樂爾家室 華之旣榮 有遺其實

저 새들 우리집 뜰에 날아와 매화나무 가지에서 쉬고 있네 

매화향 짙게 풍기니 그 향기 그리워 날아 왔구나

이제 여기 머물며 가정 이루고 즐겁게 살거라

꽃도 이미 활짝 피었으니 주렁주렁 매실도 열리겠지


다산 정약용,<매조도(梅鳥圖)>, 1813, 비단에 담채, 44.9 × 18.5 cm, 고려대박물관 소장.


다산은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도 함께 써넣었다.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敝裙六幅 歲久紅渝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爲小障 以遺女兒

강진에서 귀양살이한 지 몇 해 지나 부인 홍 씨가 해진 치마 6폭을 보내왔다. 너무 오래되어 붉은색이 다 바랬다. 그걸 오려 족자 4폭을 만들어 두 자식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이 작은 그림을 그려 딸 아이에게 전하노라.


부인이 보내온 해진 치마. 그걸 오려 그림을 그렸다니 유배객의 곤궁한 삶이 진하게 전해온다. 흑산도로 유배 간 형 정약전, 남양주에 두고 온 부인 홍 씨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정조에 대한 그리움.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 18년은 온통 그리움이었다. 그 그리움이 <매조도>를 탄생시켰다. 매화와 참새의 모습은 맑으면서 처연하다. 참새는 얼마 전 출가한 딸의 부부를 상징하는 것 같다. 먼 데를 바라보는 참새의 모습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인다. 유배를 떠나올 때, 딸 아이의 나이 겨우 여덟 살이었으니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딸의 모습이 그렇지 않았을까. 1813년 다산초당의 봄날은 이렇게 애틋한 시정(詩情)으로 가득했다. 그림에 담긴 유배객의 내면 풍경이 이처럼 투명할 수 있다니…. 추사 김정희의 유배 그림 <세한도(歲寒圖)>와 그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간다. 눈 내린 백련사도 좋았지만 뙤약볕의 백련사와 배롱나무 또한 가슴을 설레게 한다. <매조도>를 다시 보니 강진이 그리워진다.



이광표(1965-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학사, 홍익대 대학원 석사, 고려대 대학원 박사. 동아일보 문화재 담당기자를 거쳐 현재 정책사회부장.「근현대 고미술컬렉션의 특성과 한국미 재인식」(박사논문, 2014),『명품의 탄생-한국의 컬렉션 한국의 컬렉터』(산처럼, 2009),『한국미를 만나는 법』(이지출판, 2013),『한국의 국보』(컬쳐북스, 2014) 등 저술.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