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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나는 누구인가? 마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김상훈

런던 여행 중에 코톨드미술연구소(Courtauld Institute)에 딸린 작은 미술관을 방문했다. 코톨드갤러리라 불리는 그곳은 중세 미술에서부터 모네, 마네, 르누아르, 고갱, 고흐 등 인상주의 및 후기 인상주의 작가의 그림까지 그야말로 보석 같은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전날 프리즈아트페어에 참석하여 현대미술을 질리도록 본 터라, 조용히 옛 화가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코톨드갤러리에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삐걱거리는 마루를 조심스레 밟으며 하나씩 그림을 훑어 나가던 나는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을 보는 순간, 마음 한구석이 휘청거리는 것을 느꼈다. 고흐의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이나 고갱의 <꿈>을 이 미술관의 대표작으로 다들 이야기하지만 내게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에두아르 마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1881-82, 캔버스에 유채, 130 × 96 cm, 

코톨드미술관 소장 ⓒ Zenodot Verlagsgesellschaft mbH


이 그림은 에두아르 마네가 사망 1년 전에 완성한 그림이다. 폴리 베르제르는 파리에 있던 이른바 ‘콘서트 카페’인데 밥도 팔고 술도 팔고 공연도 하는 복합 엔터테인먼트 공간이었던 듯하다. 부자들과 예술가들이 많이 찾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림의 왼쪽 위를 보면 공중그네를 타는 곡예사의 발이 보인다. 대형 샹들리에와 거울에 비친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릇 부딪치는 소리와 와글거리는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일단 이 그림이 묘사하는 장소를 완벽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림을 볼 때 주변부터 보고 마지막에 중앙을 살피는 내 습관이 이 그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 것이다. 


이제 그림 중앙의 여인을 보자. 여자 바텐더, 즉 바메이드(Barmaid)다. 지쳐 보인다. 당시에 여급들이 은밀한 매춘을 했다는 역사적 기록을 떠올리니 힘든 삶에 지친 그녀의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체념한 듯도 하고 외로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바에 두 손을 짚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당당하다. 손님들의 음탕한 눈빛과 말투, 곡예사에 대한 환호와 술주정 속에서 자신만은 흐트러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듯한 자세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이 격하게 공감되었다. 이 그림을 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바메이드 뒤의 거울에 비친 수많은 고객 중에 하나인가, 아니면 그녀에게 작업을 걸고(혹은 은밀한 거래를 제안하고) 있는 남자(그림 우측 위)인가?


나는 모네의 풍경화도 좋아하고 로세티와 같은 라파엘전파(Pre-Raphaelites)의 화가들이 그린 아리따운 영국 아가씨들의 그림도 좋아하지만, 나를 돌아보게 하는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같은 그림을 특히 좋아한다. 그림 속에 대형 거울을 배치한 마네의 의도가 그것이 아니었을까? 피할 수 없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한번 보라고. 거울 모서리에 ‘딱 걸린’ 한 신사가 만약 나라면 나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이 그림의 주인공인 바메이드의 이중적인 모습은 혼란을 가중시킨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뒷모습은 구도상으로도 많이 어색해 보이지만(마치 다른 사람 같다), 몸의 자세를 볼 때 적극성마저 느껴진다. 정면에 보이는 그녀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내가 뭘?” 하는 표정이다. 순간 나는 신사가 아니라 그녀에게 빙의된다. 나는 그녀다. 이럴까 저럴까 고민하면서 매일매일 결정장애에 시달리는, 북적이는 도시의 활기찬 모습을 사랑하면서도 혼자만의 공간을 찾고, 현실의 책상에 몸을 붙이고 의연하게 일상의 의무를 다하다가도 달콤한 제안 앞에 순식간에 몸을 앞으로 기울이는, 그런 그녀가 바로 나다.



김상훈(1966- ) 서울대 경영학과 졸. 미국 시카고대 MBA, 스탠포드대 마케팅 박사. 서울대미술관 실무위원, 정부미술품운영위원회 위원장, 서울시 여론조사 자문위원 등 역임. 정진기 언론 문화상 대상과 서울대 교육상 수상. 『2015-2017 앞으로 3년 세계 트렌드』 등 다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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