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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트리니다드에서의 만남

이승엽

2010년에 쿠바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도청 소재지에 해당하는 도시들을 한바퀴 돌았다. 

해가 지면 광장에서 펼쳐지는 밴드를 곁들인 춤판을 제외하면 트리니다드는 쿠바의 지방 도시 중에서도 고즈넉했다. 작고 특별히 할 일은 없는 트리니다드에서 내가 한 행동 중에서 특별한 것은 그림을 두 점 샀다는 것이다. 여행하면서 그런 적이 드문 일인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여러 군데를 돌아보는 여행의 한가운데서 굳이 짐을 보탰다. 작은 도시답지 않게 갤러리가 눈에 많이 띈 탓인지, 할 일이 없어 어슬렁거리다 보니 그런 것인지 모를 일이다.

작은 도심을 천천히 그리고 하릴없이 이리저리 어슬렁거린 것은 맞다. 그러다가 그를 만났다. 광장 근처의 골목에 있는 작은 갤러리에서 나무판자를 이용한 소품을 팔고 있었다. 작품은 주로 쿠바 사람들을 낮은 부조로 그렸는데 생생하고 친밀했다. 갤러리의 주인이자 작가가 라자로 니에블라 카스트로다. 갤러리는 그의 작품만 다뤘다. 그의 이름은 이 글을 쓰면서 그림 뒤에 있는 사인을 보고 확인한 것이다. 인터넷 정보에 의하면 그는 1974년생이다. 내가 만났을 때 30대 중반이었던 셈이다. 시엔푸에고스에서 태어나 트리니다드에서 그림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트리니다드에 눌러앉은 모양이다. 이런 시시콜콜한 정보도 인터넷에서 얻었다. 

흥미 있어 하지만 살 기색은 보이지 않는 나를 그는 작업실로 안내했다. 갤러리에서 걸어서 5분쯤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작업실은 갤러리와 달랐다. 좋은 작품들은 갤러리에 내놓지 않았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스페인 전시를 위해 준비 중이고 전시할 작품은 팔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곧 스페인에서 전시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확인해보니 당시에 그런 전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희망 사항이었던 모양이다. 대신 올해에 미국의 미니애폴리스의 한 도서관에서 그의 작품이 20여 점 전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전시회 제목이 ‘프로파일’이다. 그가 주로 쿠바 사람을 그리고 있으니 딱 맞는 제목이다. 그런 의미로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작품도 그리 불려도 되겠다. 내 그림도 딱히 제목이 없다.

라자로 니에블라 카스트로, 무제, 42×62cm


그가 사용하는 재료는 문짝이었다. 트리니다드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 도시다. 올드 카를 생각해보면 쿠바라는 나라 자체가 오래된 물건을 잘 쓰기도 하지만 더이상 사용 못 하고 버리는 나무 문짝도 넘쳤던 모양이다. 나무 문짝은 오랜 세월을 견뎌낸 만큼 견고하면서도 품위가 있다. 작업실에서 그가 가장 덜 아끼는 작품을 하나 샀다. 현금의 유혹과 팔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게 보였지만 결국거래가 이루어졌다. 가진 현금 모두를 털어서 줬던 기억이 난다. 별로 큰 금액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쿠바에서는 신용카드가 통하지 않아 주로 현금을 가지고 있었지만 평범한 여행자 수중에 큰돈이 있을 리 없다. 

그의 작품은 공항에서 한 번 더 평가받았다. 하바나의 공항에는 미술품 반출을 체크하는 전문관료가 따로 있었다. 정식으로 갤러리에서 신고하고 구입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세금을 내지 않은 그림은 그의 감정에 따라 세금이 부과되었다. 말하자면 그는 전문 감정사인 것이다. 모든 그림은 그의 확인을 거쳐야 했다. 내 가방에도 그의 검색대상이 서너 점이 있었다.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림을 펼쳐보고 확인서를 따져보았다. 라자로의 그림은 본 그는 이 작품은 세금 부과 대상이 아니라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캔버스에 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쿠바의 규정에 의하면 평면 회화만 그림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라자로의 그림은 문짝에 조각하고 그린 것이라 그 대상이 아니었다. 라자로가 서툰 영어로 세금 낼 필요가 없다고 한 이유가 이해되었다. 그러면서 작품은 매우 좋다고 쿨한 감식평을 추가했다. 그 날 내게 추가로 세금이 부과된 것은 길거리에서 산 싸구려 체 게바라 그림이었다. 세금을 내느니 버리고 갈까 싶었던 기념품이었다. 여행 후에 다시 꺼내 본 적이 없으니 그때 버리는 게 나을 뻔했다.

그림은 지금 집의 부엌에 걸려 있다. 노인이 물고 있는 시가가 그림이 걸린 장소와 잘 안 맞기는 하지만 그냥 그렇게 두고 있다. 그림을 걸고 아끼는 데 별로 흥미가 없는 내게는 이나마가 큰 성의다. 몸이 고단하면 가끔 쿠바가 생각난다.


- 이승엽(1961- ) 서울대 불문과 학사, 동 대학원 졸업.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 등 역임. 현 세종문화회관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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