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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질주하는 삶으로부터의 도피, 거기서 만난 자유

이소연


앙리 마티스, 춤, 1909, 캔버스에 유화, 259.7x390.1cm, 뉴욕 MoMA 소장.

 어느 이른 봄날이었다. 천천히 아침을 먹고, 느릿느릿 집을 나섰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왠지 저쪽 햇볕이 더 따사로운 것 같아.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발이 먼저 움직였다. 걷다 보니 시청 앞이다. 서울도서관에 갈까 생각했지만, 이렇게 고마운 햇볕을 두고 어딘가 어둑한 실내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 발이 머리를 거역하고 도서관 정문 앞을 지나쳐 계속 걸었다. 광화문 안쪽에도 들어가 보았다. 여기도 역시 항상 지나치기만 하던 곳이다. 경복궁 담길을 따라 걸었다. 아직 짓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이랑 이런저런 작은 가게들을 기웃거리며 삼청동을 어슬렁거리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북한산 둘레길을 오르고 있었다. 길가에 구청에서 세운 팻말이 있었다. ‘겨울이 없다면 봄은 그렇게 즐겁지 않을 것이다.’ 바쁘게 살았던 날들이 없었더라면 그 날이 그렇게 즐겁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곽길을 따라 걷다 어딘가에서 거기까지 나를 부지런히 따라온 그림자 사진을 찍었다. 2013년 3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그 해는 내가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13년을 기다려 얻은 연구년이었다. 하루라도 멈춰 있으면 큰일이라도 날 듯이, 주변을 둘러볼 틈도 없이 질주하듯 살았던 시간이었다.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격리하고서야 박사 논문을 쓸 수 있었는데, 학위를 받고도 어쩐 일인지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지 않았다. 배우고 일하는 게 즐겁기도 했다. 어떤 일은 처음 해보는 거라서 공부삼아 했고, 어떤 일은 자주 해본 일이라서 남보다 쉬울까 봐 했다. 어떤 일은 사례가 후해서 했고, 어떤 일은 사례를 주지 못 하는 일이라 다른 사람이 아무도 안 한다고 할까 봐 했다. 어느 시점부터 심신이 피폐해지고 있다는 걸 느꼈지만 다르게 사는 법을 몰라 멈추지 못 했다. 건강검진 결과도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위험신호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래서 연구년 한 해 동안만큼은 온전히 나로만 살기로 했다. 어디 있을 예정이냐는 질문을 받아도 답하지 않았다. 답할 수도 없었다. 사실 언제 어디 있을 ‘예정’ 같은 것을 정해 놓지 않는 것이 그해 가장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즉흥적인 삶. 며칠 몇 시까지 어디로 가야 하거나, 어디에 있어야 하거나, 무언가를 해내야 하는 의무로부터의 완벽한 도피. 한 달이나 두 달 단위로 어디에 있게 될지 정도는 계획이 있었지만, 다음 주에 어디 있을지는 나도 몰랐다.

 미리 정하지 않는다는 첫 번째 원칙에 더해, 두 번째 원칙에 대한 갈망도 금세 의식의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올라왔다. 가능한 한 건물 밖에서 시간을 보내자는 것. 햇빛과 바람과 나무가 있는 거리나 공원으로 다리가 나를 이끄는 것을 보고서야 내 안에 그런 갈망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연구실에 스스로를 감금하고 지낸 세월이 너무 길었나 보다. 뉴욕에 갔을 때도 가장 많은 날을 센트럴파크에서 보냈다. 6주를 있으면서도 버스나 지하철을 탄 날이 이틀밖에 안 되었을 정도로 매일 걸어서 길쭉한 맨해튼을 오르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MoMA(뉴욕 현대미술관)에 갔다. 그리고 거기서 마티스의 <춤>을 만났다.

 마치 물 위에 둥둥 떠서 물결이 흐르는대로 몸을 맡기고 있는 것 같은 기분. 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건 아주 오래전에 8년간의 첫 직장 생활을 마친 후의 어느 날 수영하다 느낀 자유였다. 내 팔과 다리가 어딘가 묶여 있다가 풀린 것 같은 느낌. 글이 아닌 그림이, 그것도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을 살아낸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이 내 마음의 상태를 그렇게도 딱 맞게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너울너울….
 
 연구년이 끝나 일상에 복귀한 후 3년 반, 나는 오늘 이 순간에도 그 자유를 꿈꾼다.


- 이소연(1962- ) 이화여대 도서관학 학사·석사. 미국 텍사스주립대학(오스틴) 도서관정보학 박사. 이화여대 중앙도서관 사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역임. 현 덕성여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한국기록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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