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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경로의존이 미술 감상에 미치는 영향

신형덕

경영학에서 시간은 다양한 의미가 있다. 어느 시장에 가장 먼저 진입한 기업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기 때문에 후발 기업들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기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랜 시간은 강한 경쟁력의 근원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신생 기업은 최신 기술과 스타일을 내세워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이런 경우에는 오래되지 않은 시간이 강한 경쟁력의 근원이 된다. 미술 작품에서의 시간도 어쩌면 비슷한 것 같다. 우리는 오래전에 칠해진 물감의 느낌과 방금 칠해진 물감의 느낌을 직감적으로 구분한다. 아마도 시간에 대한 느낌이 물감 어디엔가 남아있는 것 같다. 어떤 때에는 빛바랜 깊은 색채가, 어떤 때에는 신선하고 활기찬 색채가 우리의 눈길을 더 끈다. 혹시 그런 느낌을 알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먼저 칠해진 물감은 나중에 칠해진 물감보다 아래에 깔린다. 우리는 그 중첩된 물감 사이에 놓인 시간을 느낀다.

TIme Flow 20173, 2017, Acrylic on Canvas, 60.5×73cm

최근 전시(2017.6.27-7.2, 사이아트스페이스)를 마친 이상은 교수는 시간을 주제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어찌 보면 단순하다. 가로줄과 세로줄 때로는 사선들이 중첩되어 있으면서 뭔가 기하학적인 질서를 보여준다. 이상은 작가의 해석도 어찌 보면 단순하다. 이 줄들은 기억을 의미하는데, 다양한 기억들이 중첩되는 현상을 그림으로 구현한다는 것이다. 2017년의 작품 <집적>에 대한 작가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하나하나 옆으로 붙여진 나무들이 하루, 한 달, 1년의 단위를 의미”하고 그 결과 ‘집적되어 있는 시간’을 보여준다. 추상 작품이지만 왠지 친숙하고, 작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필자는 사실 대학에서 정규적인 미술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미술의 이해’같은 교양 과목 하나 수강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미술 평론을 읽어도 이해하기 힘들고, 스스로 평론을 하는 것은 꿈도 꿔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요즘 미술관에 가면 나름 내가 좋아하는 그림 앞에 오랫동안 서서 감상도 해 보고, 딸아이와 같이 미술관에 갈 때는 함께 그림에 대한 느낌을 나누기도 한다. 물론 딸아이의 미술 감상법을 망쳐 놓치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없지는 않지만, 이제는 그냥 내가 느끼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스스로 즐기기로 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세상에 말을 건다. 마치 가수는 노래를 통해, 교수는 논문을 통해, 정치가는 연설을 통해 세상에 말을 거는 것과 같다. 어떤 경우에는 오해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개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 세상에 그렇게 나쁜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나는 작품을 보면서 나름대로 즐기고 싶을 뿐이다.

이상은 작가는 필자와 초등학교 동창이다. 대학교도 같이 다녔는데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자주 만나면서 공통된 추억이 많이 쌓였었다. 이상은 작가가 작품에서 그은 선 중에는 필자를 포함한 초등학교 동창생들과 갔었던 MT도 있고 친구들로부터 초대받아서 갔던 전시회나 공연도 있으며 각종 주점에서의 추억도 있을 것이다. 혹시 그런 의도로 그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그러면 그 작품들은 내게 친숙해지고 그 앞에 서 있으면 마치 오랜 친구를 마주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되기도 한다.

경영학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면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대부분의 기업은 다른 기업이 모방할 수 없는 경쟁력을 가지려 애쓴다. 사실 모방할 수 없는 경쟁력은 존재하기 힘들다. 모든 강점은 궁극적으로 모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가지 예외가 있는데, 그중 한 가지는 바로 시간이 개입되는 경우이며, 이것을 ‘경로의존적 경쟁력’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는 좋은 평판은 신생 기업이 아무리 애를 써도 모방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다른 평판, 예를 들어 신선한 이미지 등으로 대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여전히 중첩된 시간이 빛나는 기업을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갓 색칠된 기업의 컬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상은 작가의 작품 <집적>이 20년 만에 완성되었다는 사실도 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 신형덕(1967- ) 서울대 경영학 학사 및 석사, 오하이오주립대 박사. 한국문화예술경영학회 회장, 홍익대 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학과장, 한국전략경영학회 부회장 역임『. 잘되는 기업은 무엇이 다를까』 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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