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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영혼이 맑은 화가, 박돈

김초혜


박돈, 봄처녀, 김초혜 소장


그림은 말 없는 詩요, 시는 말하는 그림이라고 그리스의 서정시인인 케오스의 시모니데스는 말했다. 화가 박돈(박창돈, 1928- )의 화폭은 언제나 문학적이다. 문학적이라는 말은 화폭에 이야기뿐만 아니라 시(詩)의 요소가 많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시의 요소가 담겨져 있는 그림, 그것은 다시 말하면 인생의 측면들이 다양하게 드러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다음의 특징은 한국적 정서감과 한국적 색조의 조화일 것이다. 백자와 토끼와 초가와 나목(裸木)과 소녀와 석류로 이루어진 소재들의 상관관계 속에서 모태의 향수 같은, 또는 먼먼 메아리의 여음 같은 한국적 정서감이 화폭에 흐른다. 그리고 그 소재들의 연관은 무광택의 색조들로 감싸이고 형성되면서 어딘가 음울한 듯하기도 하고 적막하기도 하면서 그러면서도 아늑함과 부드러움과 포근함과 따스함을 자아내는 화폭은 우리의 가슴에 상실된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박돈 화백의 개성적인 특색은 바로 그 무광택의 색조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서양문화가 ‘빛과 광택’이 그 기본이라면 동양문화, 특히 우리의 문화는 ‘은근과 무광택’이 그 기조를 이루고 있음은 더 말할 것이 없다. 화가 박돈은 그 색조의 발현을 독특하게 완성시킨 것이다.서양화는 분명 그 재료나 기법이 ‘서양의 것’이다. 그러나 일단 문화권과 인식의 세계가 달라진 화가에 이르면 그 ‘서양적인 것’이 화가의 개성적 세계에 지배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면서 가장 바람직한 예술 세계의 창조라 여겨진다.그런 측면에서 화가 박돈은 그 어려운 사슬을 과감하게 벗어난 모범적 예술인이다. 우리는 정서감 상실의 그림이나, 누군가를 많이 흉내 내고 있는 그림이나, 자아가 부재한 그림들을 흔하게 대해 오고 있다. 그런 그림들을 대하면서 느끼는 공허나 적막감을 박돈 화백의 그림을 보면서 보상받는 기쁨이 크다. 화가 박돈이 현재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길고 먼 고뇌의 길을 돌아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화가도 그 고뇌의 길을 설명하지 않았고, 보는 입장에서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오직 그림이 있을 뿐이다.


박돈 화백의 그림을 거실에 모셔 놓고 살아온 나날이 40여 년이 되었다. 그리고 시집의 표지화로 쓴 적도 있다. 그 오랜 세월 지루하다거나 바꿔 걸고 싶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림을 그린 박돈 화백과 그 그림을 보는 사람의 영혼이 일치된 것은 아닐까. 어찌 되었든 이 그림은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는 위대한 영혼의 집이다.이 그림의 색감의 개성은 무광택에 있고, 깊고 은은한 한국미의 표출에 있으며 기법적 개성은 입체적 돌기의 화법에 평면적 구조를 형상화함이라고 할 수 있다. 정답고 유연하게 이어져 간 산줄기, 그 선의 흐름은 앞에 서 있는 유순한 처녀의 모습과 깊은 맥이 통한다. 그 선의 부드러움은 넉넉하고 안온한 느낌을 주는 것과 동시에 해와 분홍색 저고리에 봉긋하게 솟아오른 앞섶과 머리에 꽂은 진달래! 직선이 감추어진 곡선과 곡선의 미학! 박 화백은 진정한 한국의 화가이다.박돈 화백의 그림을 보면서 감탄과 함께 그림은 선과 색으로만 그려지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봄과 처녀와 반쯤 떠오른 해와 진달래, 거기에 선과 색으로 창출되는 것이 아닌 그것과는 별개로 화가의 특유한 영혼이 용해되어 있는 것이다.박돈 화백의 그림 속에는 화가가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가치관과 인생관이 용해되어 있는 것이리라. 그는 고향을, 생명의 근원을 그리워하며 우리의 내면에 스며 있는 우리의 본모습인 은근함을 그려 내고 있다.


인생 황혼녘에 드리워진 화가 박돈의 긴 그림자는 그의 예술혼의 길이와 정비례한다. 서양의 그림을 한국적 정서로 재탄생시킨 화가 박돈은 그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영혼을 위로해 주었고, 그리고 우리가 마음껏 자랑해도 되는 우리의 자존심이었다.



김초혜(1943- ) 동국대 국문과 졸업. 196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떠돌이 별』, 『사랑굿 1』, 『사랑굿 2』, 시선집 『떠도는 새』, 『빈 배로 가는 길』, 수필집 『하얀 물감』 등 지음. 한국문학상(1984), 제41회 현대문학상(1996), 제20회 정지용 문학상(2008)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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