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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그림이 건네준 위안

양영은


미셸 들라크루아, Chiens perdus dans la neige, 2016, Acrylic on board, 27x22cm.

ⓒ2448문파인아츠



가끔 유명하다는 전시회에도 가보고, 최근에는 마음에 드는 그림을 몇 점 구매해본 적도 있지만, 스스로 생각할 때 여전히 멀고도 어려운 것이‘미술’이다. 내게는 학생 시절 ‘수학’과 관련해 일종의 트라우마가 있다. 당시에는 대입 본고사를 치러야 해서 수학 문제를 받으면 푸는 과정까지 답안지에 기록해야 했는데 모르는 문제를 만났을 때의 당황스러움이란…. 펜을 쥔 손에서부터 전해져오던 그 ‘어쩔 줄 모르겠는 느낌’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그런 나에게 그 느낌을 다시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그림을 그리라는 주문을 받을 때이다. 아무리 단순하고 가벼운 연필 스케치라도 정말 ‘어쩔 줄을’ 모르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그렇지만 한때는 ‘화가’를 꿈꿨었다. 정확히는 어머니께서 딸에게 유치원 시절 미술을 배우게 하셨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 벌써 크로키에 구성에 유화까지 그려봤었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시켜봤는데 도통 재능이 없는 것 같아서 그만두게 했다”하셨지만, 그때 익혔던 터키 그린(Turkish green) 같은 색감은 지금까지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색이다. 그러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데생과 수채화에서 다른 친구들에 비해 특히 어려움을 겪은 나는 결국 미술 과목에서 전체 평균을 깎아 먹는 지경에 이르며‘미술은 어렵고도 겁나는 것’이라는 스스로의 판단에 봉착, 점차 마음의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런데 지난해 나는 개인적으로 인생에서 쉽지 않은 시기를 맞닥뜨렸다. 삶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적인 삶이라는 부분과 일이라는 부분이 어느 한쪽도 단단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휘청대는 느낌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제까지 뭘 하고 살았나’하는 허무감마저 엄습해왔다. 뭐라도, 누구라도 나를 위로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기도로 버티던 시기였는데 그런 나에게 그림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 옆 그림, 또 그 옆 그림…. 그림을 그린 작가가 누구인지 궁금해 난생처음으로 거의 날이면 날마다 그 갤러리로 출근(?)을 하다시피 했다.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걱정이 눈 녹듯이 잊히는 듯했다. ‘그림이 건네는 위안’을 처음 느껴봤다고나 할까? 어쩌면 가장 꿈 많던 시절 처음 외국에서 살았던 프랑스 파리를 풍경으로 주로 그린 그림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가장 좋아하는 눈(雪)과 개(犬)가 등장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색감이 동화처럼 아름다워서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가 많지만, 굳이 그 이유를 일일이 설명하려 들지 않아도 그저 좋았다. 그린 사람이 궁금했고,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호기심이 들었으며, 어떤 사람일까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미술과의 인연을 새롭게 

미셸 들라크루아(Michel DELACROIX)는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고,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마음에서 꺼내보는 그리운 그림으로 남아 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난생처음 ‘그림이 주는 위안’을 경험한 후로 ‘미술’을 삶 속에서 가까이 만날 일들이 계속 생겼다. 영화 <러빙 빈센트>를 보고 고흐의 아픔에 공감하느라 마음속까지 아린 경험을 하고 얼마 전에는 ‘마리 로랑생-색채의 황홀’ 전시회에 가서 한 여류 화가의 이루지 못한 사랑과 꿈을 이루기 위한 희생, 그리고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 인생이라는 진리 앞에 나도 모르게 기도를 올리게 되었다. 지금은 무척 궁금하다. 인생의 이 시점에 다시 마음으로 미술을 만나게 된 내가 어디로 향할지. 생각해보면 남들보다 일찍 시작됐었던 미술과 나의 인연이 어떻게 다시 꽃피우게 될지 기대된다. 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다시 붓을 쥐게끔 할까? 올록볼록한 종이에 늘 그려보고 싶었던, 하지만 내가 제일 못 그리고 두려워하는 수채화를 배우게 될까? 아니면 그나마 겁이 덜 나는 유화? 그것도 아니면 깊이를 쌓고 싶고 안목을 키우고 싶고 계속 배우고 싶다는 의미에서 문화부에 가서 ‘미술 담당 기자’를 노력해볼까? 이렇게 생각해보니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미술의 자리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알아차렸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그리고 그 깨달음이 새삼 너무 반갑고 감사하다.



양영은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미국 MIT MBA. KBS 1TV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앵커. 바른말 보도상(2014), 최은희 여기자상(2017) 수상. 『나를 발견하는 시간-하버드 MIT 석학 16인의 강의실 밖 수업』 지음. 현 KBS앵커, 방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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