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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구상에서 추상을 창조해온 주수일

박광무

향암(鄕岩) 주수일(朱秀一, 1941-) 선생은 소탈하다. 그래서 나는 그와 만나면 즐겁다. 그의 호도 고향의 바위이거늘, 늘 느끼는 바이지만 그를 대하면 바위 같은 묵직함과 함께 촌부의 시골스러움이 묻어난다. 우리나라 추상의 대가로 흔히 유영국 화백을 꼽는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향암의 처가가 유영국 화백과 같은 울진이다. 향암의 말에 의하면 처가의 동네에서 항상 대면하는 현상들을 화폭에 추상화하여 옮기는 작업을 즐겨했다고 한다. 물론 그의 작품이 모두 처가의 풍광에서만 따왔다고 하기는 무리이겠다. 하지만 대부분 그의 작품을 대하면서 받는 느낌이, 그리고 향암 스스로 자신의 작품 제작배경을 설명하면서 들려준 이야기가 그러하기에 나는 이를 사실대로 기술할 따름이다.


향암의 작품에는 꾸밈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인간성을 존경한다. 그의 붓질에는 수없이 반복한 흔적이 쌓여있다. 그것은 선인(仙人)의 참선(參禪) 경지를 닮았다. 붓질만이 아니다. 가령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가는 재료 중 하나인 닥종이를 반복하여 으깨고 붙이고를 얼마나 반복하여 입체감과 생동감을 줄 수 있을까. 나는 글쓰기를 하면서 대체로 퇴고(推敲)를 10여 차례 한다. 그런데 그림이나 조각을 하는 분들은 칠하기와 붙이기와 쪼고 갈기를 얼마나 되풀이해야 할까. 가히 수천 번 혹은 수만 번이라도 해야 할 경우가 있을 것이다. 글쓰기를 하는 문인(文人)의 경지와 그림이나 조각을 하는 예인(藝人)의 경지는 반복의 정도에서 어쩌면 비교가 될 수 없는 차이를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그는 한창때 약주를 아주 즐겨했다. 때로 필름이 끊긴다고 할 정도로 말이다. 차수 변경을 하며 농주나 소주나 양주를 마시기도 했을 것이다. 하루는 그가 밤늦은 시간에 갑자기 나에게 불쑥 전화를 해왔다. 술이 잔뜩 취한 목소리다. “나 향암미술관을 철수할 거요!” “아니 교수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시골에서 그의 혼신의 작품세계를 담아놓은 미술관을 운영하면서 속상한 일이 한둘이랴! 그 마음을 나에게 털어놓는 전화였을 터인데 난 영문 모르고 “철수하려면 해보시오.”라고 쏘아붙였다. 술김에 한 얘기를 난 곧이곧대로 들은 것이었다. 그의 향암미술관은 지금도 백암온천 입구에 든든히 서 있다. 



향암 주수일, 무제, 박광무 소장


흔히들 통음을 하는 이에게서 가식이 있을 수 없음을 잘 알지 않는가. 필생의 작품세계와 애지중지하는 컬렉션을 모두 쏟아놓은 곳이 그의 향암미술관이다. 그에게서 구도자 같은 예술가의 모습을 본다. 구상(具象)의 세계가 때로는 고달프고 분노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를 추상화하여 추억의 편린들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고자 함이 예술가의 숨은 심정이 아닐까 라고도 생각해본다. 그의 작품은 오늘도 한국인의 지나온 삶의 여정을 현재로 회귀시킨다. 미래에 영원히 기억될 타임캡슐 속의 알갱이들처럼 말없이 보는 이를 마주 보고 있다. 구상의 세계는 역사를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려 한다. 그러나 추상화된 작품은 역사를 이야기로 만들고 자연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것은 자연과 현상과 사실을 인문과 문화와 예술로 이끄는 과정일 터다.


오래전에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미술작품을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보고 느끼라고 하였다. 나는 오늘도 나의 거실 한쪽에 자리하고 있는 향암의 작품을 보고 느낀다. 그저 들며 나며 바라보며 눈으로 마주치고 마음으로 인사를 나눈다. 마음속에 향암을 그린다. 마음속에 고향의 바닷가 흙돌담 벽을 회상한다. 그 돌담 벽에 끼여서 새 생명을 잉태하는 연초록의 가냘픈 강아지풀 잎사귀를 그려본다. 추상(抽象)을 관조함이 구상(具象)의 세계를 상상케 한다. 이 아침에도 내 마음에 고향의 새 봄 내음을 실어다 준다.



박광무(1954- ) 성균관대 행정학 박사. 한국문인협회(수필분과) 정회원, 『현대문예』지 등단(수필가 2008.1, 시인 2011.3). 이어령 초대 문화부장관 비서관, 문화관광부 문화예술국장, 한국문화관광연구원장 역임. 성균관대 초빙교수, KMN한마당 대표, 이화여대 호서대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강사. 『가출 아빠의 사랑스케치』(2006),『 한국문화정책론』(2010),『 975 공스타그램』(2017) 외 다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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