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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눈에 선한 작고 작가들, 재조명 재평가 작업이 필요하다

정중헌

언론 인생을 접고 대학에 와있지만 미술기자로 활동하던 때의 일들이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아직도 내 마음속 창에는 운보(김기창)의 호탕한 웃음과 천진난만한 미소가 어른거린다. 눈을 감으면 천경자의 채색과 풍물이 환상처럼 스치고, 명륜동 골목의 장욱진 화백 표정이 선명하게 새겨진다. 성북동 너른 저택에서 병마를 딛고 붓을 잡던 변종하 화백, 방배동 골목을 산책하던 유영국 화백, 화단의 멋쟁이 신사 이대원 화백…. 그들은 지금 저세상으로 떠났지만 그들의 그림들을 보면 생전의 체취와 함께 추억이 코 끝을 찡하게 한다. 천재성을 번득이다 요절한 박길웅, 소녀처럼 여렸지만 불꽃처럼 살다 간 최욱경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화가들이다. 국전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기뻐하던 박길웅 화백과 분신이었던 부인,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최욱경 화백의 최초 인터뷰에 기뻐하던 아버지의 눈물 같은 사소한 기억들도 잊혀지지 않는다. 선비 화가 월전(장우성)은 자상하면서도 호방했고, 미술평론의 길을 터놓은 이경성 선생은 언제 만나도 부드러웠다. 기라성 같은 화가 중에서 비디오 예술의 선구자 백남준은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미국에서 금의환향해 단독으로 가진 인터뷰에서 “예술은 고등사기”라는 명언을 남긴 그는 그냥 천재가 아니라 뉴욕타임스의 국제면ㆍ경제면을 통독하는 지식인이었고, 우리의 굿은 물론 한글의 과학화까지 논할 만큼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던 예술가였다.


이 모든 분들이 지금 세상에서 잊혀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작고 화가 중 일부는 옥션에서 인기를 얻고 있지만, 대다수는 서서히 중심에서 주변으로 밀려나고 있다. 현대미술가 중 작고 후에도 인기와 명성을 꾸준히 이어가는 화가는 박수근, 이중섭 정도다. 이들의 작품은 독창성 희귀성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삶 자체를 신화처럼 부각시킨 평전과 소설, 그리고 부단한 회고전과 매스컴 학계의 재조명이 있어 스타로 떠오른 것이다. 김환기, 유영국, 장욱진 등은 지금도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작품의 예술적 깊이나 작가 정신은 더 캐내어 알릴 여지가 많다. 우리 예술계 전반이 보다 관심을 기울이면 세계에 내놓을 만한 작품성과 이야기를 지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옥션의 가격으로만 회자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아쉬운 분야가 한국화이다.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 심산 노수현, 이당 김은호 등 근대 6대가의 작품들이 미술시장에서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만 해도 중국화ㆍ일본화가 서양화보다 값이 높고 국민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여름방학 겨울방학 대목마다 국공립 미술관에서 서양의 블록버스터 전시회가 열리지만 한국화 대가들의 기획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실정이니 그들의 존재조차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국공립 미술관 중 한 곳이라도 창의적인 기획으로 6대가와 그 이후를 재조명, 재평가하는 작업을 지속해 나간다면 국민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미술시장에서의 가치도 달라질 것이다. 말로는 글로벌을 외치면서도 우리 정서와 미감(美感)이 응축된 한국화를 푸대접한다면 서양 흉내 밖에 더 내겠는가.



실정이 이렇다보니 운보 김기창 같은 현대 대가가 올바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청각 장애를 딛고 화가로 우뚝 선 운보는 바보 산수 등 한국화를 다양하게 실험해 나간 창의적 아티스트였다. 생전에 그는 의욕적으로 창작활동을 했는데 지금은 그의 작품을 체계적으로 감상할 만한 곳이나 변변한 기획전 조차 없는 형편이다. 뉴욕에서 투병중인 천경자 화백은 서울시에 작품을 기증해 서울시립미술관 특별실에 가면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가 있다. 월전 장우성은 생전에 미술관을 지었고 이천에 기념관이 마련되어 상설 전시되고 있다. 운보도 충북에 운보의 집이 있고 김기창미술관도 운영되고 있지만 운보라는 거목을 기리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운보 뿐 아니라 우리 미술계에는 재조명 재평가해야할 작가들이 적지 않다. 올해 개관 40년을 맞은 갤러리 현대가 지난 1월에 개최한 기념전은 한국 현대미술의 축도나 다름없었다. 도상봉, 오지호, 이응노, 남관, 유영국, 장욱진, 최영림, 박고석 등등  여기에 작품이 전시된 작고 작가들 상당수는 한국 미술사의 정립 차원에서 재조명 재평가  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미술시장에서 인기 있는 몇몇 작가만 회고전이 열리고 있을 뿐 대다수 작가들은 여러 가지 사정과 이유로 재조명 재평가 되지 못하고 있다. 재평가할만한 작가들을 방치함으로써 우리 미술시장은 작가 층이 빈약하고 일부 작가에게만 인기가 쏠리는 기현상을 빚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화상과 평론가들이 힘을 합쳐 실력 있는 작가와 작품을 재평가하는 작업을 벌여나간다면 우리 미술계는 훨씬 풍성해 질 것이다. 무엇보다 국공립 미술기관들이 한국 현대미술가 재조명 작업에 앞장서야 한다. 작가별ㆍ주제별 등으로 창의적인 기획전을 연다면 대중들의 관심도 모으고, 미술시장의 파이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 속에는 지금도 작고 화가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온갖 추억들이 생동하고 있다. 마지막 전시회에 휠체어를 타고 온 운보가 나에게 남기고 간 미소가 짠하게 떠오른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를 곰곰 생각할 때마다 우리 화단이 해야 할 일들을 소홀히 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중헌(- )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한국방송비평학회 회장, 한국예술정책포럼 대표, 서울예술대학교 부총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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