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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땅의 기억과 풍경

송수정

광주항쟁 30주년이다. 광주항쟁과 관련해 <망각기계>라는 작업을 하고 있는 사진가 노순택이 얼마 전부터 운주사에서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광주항쟁에서 가족을 잃은 많은 분들이 운주사에 와서 위로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은 다음부터라 했다. 목도 잘리고, 본래의 자리도 잃어버린 채 세월과 함께 뒹굴어 온 운주사 석불 앞에 선 그분들의 깊은 침묵이 짐작되었다. 누워 있는 운주사의 미륵이 일어서는 날,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는 전설을 들먹거리지 않아도 운주사는 이미 평범치 않은 장소다. 운주사 전체를 휘덮은 천불천탑의 흔적들은 인간의 신성한 노동과 그 노동을 가능케 하는 신념에 대해 묻게 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덧없기만 한 인간과 그 인간을 보듬어 안는 우주의 섭리를 깨닫게 한다. 



김억의 땅은 가장 큰 생명력 

김억의 목판화 <운주사>는 운주사가 품어내는 그 범속치 않은 기운이 공명하는 작품이다. ‘자연을 일으켜 세우려는 시적인 힘의 발전소’라는 요헨 힐트만의 운주사에 관한 표현에 공감해 ‘일어서는 땅’이라는 부제를 달았다고 작가는 설명하지만, 그의 작품 속에서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이미 일어서고 있다. 원근감을 무시한 김억 특유의 부감기법은 마치 산 위에서 바라보는 듯 운주사의 모든 것을 한눈에 조망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공간과 시간을 무한 확장시켜 버린다. 마치 책을 읽어나가듯이 구석구석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편집되어 있으나, 그 비현실적 구성이 진경으로 와 닿는 까닭은 화폭에 담긴 구석구석마다 그가 손수 멈추어 서서 더듬고 느낀 그대로를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도는 관념적이되, 전체 화폭은 진경의 감흥을 뿜어낸다.  


지금껏 김억은 우리 국토의 짜투리 땅까지를 발로 누비며 그 땅이 품고 있는 시간과 기억을 현재로까지 끌어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해 왔다. 그가 목판으로 옮겨 담는 과거로부터의 장소들은 여전히 현재와 호흡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순환하는 역사다.  “사람이 어떤 땅 위에 산다는 것은 그때 그때의 기획을 넘어서 시공간의 한 덩어리에, 생물학적 물질적 정신적인 관계를, 또 기억을 통한 관계를 맺는 것”이라는 김우창의 말처럼 김억에게 땅은 그의 작업의 가장 큰 생명력이다. 땅 위에 산다는 것은, 특히 누군가와 한덩어리진 땅 위에 산다는 것은 무수한 관계의 복선 속에 놓인다는 뜻이다. 땅과 사람의 관계, 땅을 지배하려던 사람과 지배를 막으려던 사람과의 관계, 세월의 풍상에 변해가는 땅과 땅 사이의 관계. 이 관계들의 실타래, 혹은 이 관계들의 얽혀진 실체가 김억에게는 풍경이다. 


풍경은 땅이자 국토이지만 동시에 지나간 시간을 품고 있는 기억의 매개이자, 우리 삶이 펼쳐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이 세상이다. 풍경은 시간과 계절에 따라 저절로 그 모습을 달리하지만, 동시에 그 속에 어떤 사람들을 품고 사느냐에 따라서도 변하고, 같은 풍경일지라도 그 풍경을 바라보는 이들 저마다의 기억에 따라서도 달리 보인다. 풍경은 고정되어 있는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단단하고 커다란 기운인 듯 하면서도 주변과의 관계 맺기 속에 있는 유기체다. 풍경은 그곳에 깃들어 있는 지난 시간의 추억, 그곳을 바라보는 이의 상념과 삶의 무게가 버물러질 때에만 완성된다. 그래서 풍경은 운주사를 찾은 광주항쟁 희생자의 유가족들에게처럼 상처이자, 치유이고, 현재이자 기억이다. 요헨 힐트만은 운주사가 ‘노동과 소유와 유용성이 녹아 있는, 생산과 예술이 조화를 이룬 범속한 장소’라 표현했다. 김억의 <운주사>야 말로, 발과 손의 노동이 예술과 조화를 이룬 범속하면서도 비범한 작품이다. 



송수정(1975- ) 한남대 미술교육 학사. 전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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