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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예향, 전주를 기억하며

신경민

강암 송성용, 석죽도(石竹圖), 1980, 65.5×12cm


어렸을 적 1950-60년대 전주에는 예술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수많은 문화시설과 교습소가 있었고 집과 거리와 골목에, 심지어는 식당과 다방 등 영업집까지 예술이 깃들어 있었다. 특히 다방은 중요한 문화적 포인트였다. 진하고 쓴 커피에 도라지 위스키 몇 방울과 계란 노른자를 넣어 만든 이른바 모닝커피를 마시는 일과가 정치·경제·문화 쪽 인사들에게 하루의 중요한 시작이었다. 기자였던 아버지는 작은 아들인 나를 즐겨 다방에 데리고 다녔다.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가면 동양화와 서예가 사방에 펼쳐 있었다. 허백련, 이상범, 노수현, 변관식 같은 근대 4대 명가의 그림들을 비롯해, 모작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겸재 같은 대가의 그림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그림, 한자 등을 학교에서 배우기 전에 그렇게 접하고 배웠다. 이성계가 다녀갔다는 오목대를 넘어가면 향교가 있고 근처에 한학을 하는 선비들이 살았다. 이 선비들이 운영하는 서당이 있어 논어, 맹자를 곡조에 맞춰 읽는 소리가 거리에까지 낭랑하게 들렸다.

선풍기가 희귀품이었던 당시에는 합죽선에 멋들어진 그림이나 글씨를 담아 손에 쥐고 더위를 식히는 게 점잖은 양반들이 행세하는 일이었다. 집안으로 가면 벽장이나 문에 사각, 육각, 팔각형 또는 부채꼴 모양으로 동양화 그림과 글씨를 붙여 썼다. 지금으로 치자면 인테리어로 시서화를 활용했다. 이런 그림들은 익산, 고창 등의 지주와 토호들이 이름난 그림쟁이들을 겨울 농한기에 초청해다가 몇 달씩 그리게 한 뒤 싼값에 시중에 공급하거나 지인 등에게 나눠준 것으로 보인다. 그런 연유로 대가의 그림과 글씨가 집이나 거리나 업소에 흔하게 돌아다녔다.

우리 윗집에는 고등학교 교사였던 조부 항렬인 신석정 시인이 살았고 옆 동네인 교동, 지금의 한옥마을에는 한국 서예의 큰 경지를 이룬 강암 송성용이 이사해왔다. 강암의 막내아들로 지금 전북도지사가 된 송하진과 친구가 되어 강암의 교동 댁에 무시로 드나들었다. 그분들의 문화계 위상을 잘 모른 채 그냥 옆에 사는 아버지, 할아버지로 여기고 지냈다.

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골목에 보면 소리 한가락씩 하는 사람들이 있어 동네를 지나다 담 너머로 출렁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역시 아버지의 손을 잡고 고급 한정식 식당에 가면 소리꾼들이 창을 불렀다. 70년대 대학에 진학해 서울로 오니 그때 듣고 봤던 낯이 익은 분들이 TV에 출연하고 있었다. 춘향가 심청가 등 내로라하는 판소리 명창들의 소리를 골목과 식당에서 공짜로 듣고 자란 셈이다. 세월이 흘러 이분들이 인간문화재가 되어 언론에 소개되었다. 

그렇게 생활 속에 예술이 녹아들어 있었지만, 또 그걸 잘 보존하고 정리하는 데에는 무지했다. 골목에서 제기를 찰 때면, 다들 집에서 고서를 한 뭉치 가지고 나와 주욱 찢어대기에 붙이는 술로 만들어 썼다. 고서로 만든 제기는 오래된 고서일수록 차기 좋았고 날 때 선이 고왔다. 제기로만 아마 책을 한 수레 썼을 거다. 비단 제기뿐이 아니었다. 고서를 벽지로도 바르고, 불쏘시개로 썼다. 벽과 문에 발라놓은 그림도 해가 지나 누렇게 되면 뜯어져 불쏘시개가 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지금으로 치면 아마 수천만 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리라.

지금도 전주에 내려가면 당시 기억이 난다. 전쟁 직후 어려웠던 시절에도 글씨, 그림과 소리로 수놓았던 그 공간과 사람들은 지금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전주는 예향(藝鄕)이다. 그때의 기억들로 삶이 풍요로워졌음을 느낀 사람들이 계속 전주를 지키고 있다. 소중한 자산으로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기를 빈다.


- 신경민(1953- )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MBC 뉴스데스크 앵커, MBC 워싱턴특파원, 민주통합당 대변인,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 더불어민주당 서울시당위원장 역임. 현재 제19,20대 국회의원(영등포을), 국회 교육위원회 위원,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위원, 더불어민주당 제6정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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