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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연금술사적 예지력의 미술가, 레메디오스 바로

문소영

<천체를 잡는 사람>

레메디오스 바로(Remedios Varo 1908-1963)의 그림을 언뜻 볼 때는 천진난만한 동화 일러스트레이션 같이 느껴진다. <천체를 잡는 사람>의 경우, 길다란 잠자리채로 별을 따고 달을 따는 유쾌한 동화의 한 장면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림을 주의 깊게 보고 있으면 마냥 유쾌할 수가 없다. 달을 잡은 사람의 겹겹의 의상은 새장에 갇힌 달빛을 받아, 폭풍 직전 어스름 달밤의 먹구름처럼 이상한 광채를 낸다. 그의 야윈 올빼미 같은 얼굴은 병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그 알 수 없는 무표정은 불길한 느낌을 자아낸다. 감정이입을 할 수 없는 가면 같은 얼굴이다. 그렇다면 감정이입의 대상을 바꿔보면 어떨까? 달을 잡은 사람이 아니라 새장 속에 갇혀버린 달로 말이다. 그 순간 달의 광채는 고통 속에서 내지르는 마지막 비명 같은 구원 요청으로 느껴진다. 이 그림은 이제 명랑한 동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그 귀여운 그림체 때문에 한결 잔혹한 악몽의 한 조각이 되는 것이다.



에스파냐 출신의 멕시코 화가인 바로의 그림에는 이렇게 구속되는 것-타인에 의해서든 자기자신에 의해서든- 과 수동적인 상태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과 불안이 스며있다. 이것은 그녀가 개인사와 관련이 깊다. '마리아 데 레메디오스 바로 위 우랑가'라는 엄청나게 긴 본명을 가진 그녀는, 어린 시절 엔지니어인 아버지를 따라 이곳 저곳을 여행하면서 자유로운 정신과 예술적 소양을 기를 수 있었다. 하지만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의 고집으로 수녀원 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그녀는 폐쇄적이고 엄격한 수녀원 학교 생활을 책과 몽상에 의지해 겨우 버텨나갔다고 한다. 마침내 바로는 16세 때 아버지의 도움으로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후에도 여러 난항과 구속의 공포에 부딪혔다. 에스파냐 내전으로 자유로운 예술 활동이 어려워졌고, 그래서 1937년 파리로 건너갔다. 거기에서 막스 에른스트 등 초현실주의 예술의 리더들과 교유하면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40년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면서 갖은 고생을 겪게 됐고, 마침내 멕시코로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녀의 그림에 방랑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개인사와 관련이 깊다. 바로의 그림은 흔히 초현실주의로 분류되지만, 에른스트나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처럼 충격적일 정도로 기괴한 사물이나 비틀린 에로티시즘이 도발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반면에 그녀 작품의 자유분방한 상상과 어딘지 불안한 분위기는 자유연상과 억눌린 무의식의 표출이라는 초현실주의의 특징과 잘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여기에 가미되는 시니컬한 유머와 위트는 바로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새들의 창조>

바로는 세계를 이해하는 원리로서, 그리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으로서, 양 극단이라고 할 수 있는 신비주의와 과학에 모두 흥미를 가졌다. 이것은 결국 신비주의와 과학의 중간단계에 있는 연금술에 대한 관심과 탐구로 이어졌다. 이를 반영한 그림 <새들의 창조>를 보면, 연금술사이자 예술가인 올빼미 모습의 존재가 천체 또는 지상의 자연으로부터 얻은 색색의 안료로 새를 그린 다음, 여기에 삼각형 렌즈로 모은 별빛을 비추어서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올빼미는 그리스 신화의 지혜의 여신 아테나의 신조이기도 하다. 



<되살아나는 정물>

<되살아나는 정물>은 바로의 연금술사적 면모가 집대성된 그림이다. 원탁의 촛불을 중심으로 접시와 과일들이 마치 거대한 은하계처럼 회전하고 있는,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림을 잘 보면 맨 바깥에 돌고 있는 과일이 깨지면서 거기에서 씨가 떨어져서 바닥에 새로운 싹을 틔우고 있다. 죽음과 파괴가 곧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순환을 쉽게 압축적으로 나타낸 그림인 것이다. 바로는 이 작품을 끝낸 후 다음 작품을 제작하다가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아직 왕성히 활동할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이 그림이 그녀의 최후의 완성작으로 남게 되었다. 비록 그녀가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쉬우면서도 우주적인 깊이를 가진 작품은 과연 최후의 메세지로 어울리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새들의 창조> 속 올빼미 인간처럼 예술가이자 연금술사였던 그녀는 혹시 자신도 모르게 예지력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문소영(- ) 홍익대  예술학과 석사과정. 현 중앙데일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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