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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젊은 시절 조각가의 꿈

김원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것이 1955년이니까 벌써 50년이 넘은 옛날이야기이다. 그 학교에서는 정규교과목 이외에 학교수업이 끝난 후 과외수업으로 특활(특별활동)시간이 있어서 학생들은 의무적으로 두 개의 특활반에 가입하게 되어 있었다. 하나는 문예반, 미술반, 밴드반, 합창반같은 문화예술 관련 활동이었고, 또 하나는 수영반, 야구반, 럭비반 등 체육분야였는데 나는 조각반과 산악반을 선택했다. 이것은 지금 생각해도 중학교 1학년 꼬마의 판단으로는 잘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조각반을 선택한 결과가 이후 나의 60년 가까운 인생의 성격을 크게 좌우한 가운데 내가 미술을 알고 사랑하고 내내 그 속에 살아가게 된 중대 결심이었기 때문이다. 정규 미술수업은 박상옥, 최경한, 김경승 등 쟁쟁한 선생님들이 계셨지만 과외수업이라 해도 결코 정규수업에 뒤지지 않는 수준 높은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었다.


내가 2학년 때인가 윤영자 선생님이 우리 조각반의 지도 선생님으로 오셨다. 우리 떠꺼머리들은 이 여선생님이 무조건 좋았다. 그래서 과외 조각반은 정규수업보다도 더 기다려지는 수업시간이었다. 해마다 10월 초순이 되면 학교 전시회가 열렸다. 화신백화점 화랑이나 소공동에 있던 중앙공보관 화랑의 그 연례행사는 우리에게는 가장 큰 축제였다. 여학생들이 많이 구경을 왔기 때문에, 전시장 지키는 당번을 뽑는 일은 어렵지가 않을 정도로 신나는 기간이었다. 전시회를 보고 간 여학생들로부터 팬레터를 받는 일은 더욱 더 신나는 일이었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전시회가 끝나면, 얼마 동안 나에게 온 여학생의 편지들을 자기 서랍에 넣어 놓고 나를 교무실로 부르곤 했다. 자기 앞에서 펴보라는 것이었다. 그 축제를 위해서는 대개 여름방학 때부터 합숙하면서 준비를 하였다. 고등학생들의 합숙이란 또한 추억 만들기 같은 기간이었다. 그 6년 동안 여러 개의 ‘작품’을 만들었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사진도 찍어 놓은 것이 없어서, 여기 이 한 장의 사진이 유일하게 내게 남은 그 시절의 추억이었다.



이 <소녀상>을 만들던 해에 우리는 누드모델을 처음 썼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 A급 누드모델을 쓰게 해준 학교와 윤영자 선생님은 대단한 분들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윤 선생님이 첫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우리 다섯 명에게 주의시킨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저 모델을 아름다운 오브제라고 볼 수 있어야 해요. 옷을 벗은 여자라고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이지요. 그럴 자신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 이 방에서 나가기로 먼저 약속을 합시다.” 라고. 모범생들은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다. 그리고 과연 아름다운 오브제라고 생각하니까, 정말 그 엉큼한 생각들은 떨쳐 버릴 수가 있었다. 다만 모델이 쉬는 시간에 이야기를 나누게 되거나, 저녁을 시켜서 같이 먹게 될 때 얇은 옷을 걸치고 앉아 있는 모습은 다시 옷 벗은 여자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조각반에서 누드 모델을 쓴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학교 전체에 퍼져서, 우리 조각반 학생들은 졸지에 질시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조각실을 공연히 기웃거리지 못하도록, 일을 할 때는 매번 바깥에 한명씩 경비병을 배치해야만 했다. 점심시간에는 모두들 내 주변에 모여들어 이야기라도 듣자고 야단법석이었다.


이 작품이 그때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고, 우연히 사진반의 친구가 찍어 준 사진 한 장이 이렇게 남아 있어서 그 꿈 많던 시절을 떠올려 준다. 나는 그 이후 조각을 계속하지 못하고 건축과로 진학했으나 오늘까지도 조각반의 추억은 아름다운 사진처럼 나에게 선명하게 남아 있다. 내 인생 내내 내 마음의 미술로...



김원(1943- ) 서울대 건축공학과 학사, 네덜란드 바우센트룸 국제대학원 디플로마. 현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및 도서출판 ‘광장’ 대표, 한국 건축가협회 명예이사, 한국 실내건축가협회 명예회장, 김수근 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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