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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소호(SOHO)의 백남준

박흥영


백남준아트센터 내 뉴욕 브롬st. 스튜디오를 재현한 메모라빌리아 ⓒ 김달진 2009.8



1992년 봄, 백남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뉴욕에 갔을 때 이야기다. 오전에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미디어아트 큐레이터 바바라 런던(Barbara LONDON, 1946- )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소호(SOHO) 거리의 백남준 스튜디오를 찾았다. 백남준과의 점심 약속 때문이었지만 소호 거리를 방문하기는 처음이었다. 소호 거리는 다른 지역에 비해 임대료가 저렴하여 무명예술인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 그때는 완전히 예술인 거리로 자리 잡아 뉴욕의 관광명소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소호 거리가 유명해지자 임대료가 너무 올라서 정작 돈 없는 예술인들은 거의 다른 곳으로 쫓기다시피 이주해 나갔고 이제는 들어올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건물의 2층이 백남준의 작업실이었는데 마침 먼저 온 방문객이 한 사람 있었다. 그의 이름은 기억에 없지만 훤칠한 키에 잘생긴 젊은 흑인 남성이었는데 백남준은 그를 훌륭한 예술가라고 소개했다. 당시 백남준은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있으면서도 작업 중인 작품이나 그 밖의 물건들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정리했다. 식당으로 향하기 위해 그 예술가와 나를 먼저 내려보내고 백남준은 마저 작업실 정리를 하느라 조금 늦게 내려오게 되었다.


함께 내려온 그 예술가와 내가 작업실 입구의 길에서 백남준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옆에 있던 그가 갑자기 길 저편을 향하여 손을 높이 흔들며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서 백인 여성 두 사람과 흑인 남성, 세 사람이 함께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일행과 가까워지자 그 예술가는 더 못 참겠다는 듯이 그들을 향해 달려가더니 그 가운데 한 사람과 격렬하게 포옹했다. 이윽고 포옹은 뜨거운 키스로 이어졌고 나머지 일행은 미소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넋이 나간 채 그들을 지켜볼 뿐 할 말을 잃고 서 있었다. 그 예술가는 과연 누구와 키스를 했을까. 내 상식으로는 당연히 두 여성 중 한 사람이어야 했다. 나뿐 아니라 그 시절의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예술가의 키스 상대는 세 사람의 일행 중 유일한 남성이었다. 백주에 길거리에서 그토록 뜨겁고 긴 키스를 하는 것만도 당혹스러운데 같은 남성끼리 키스라니… 어쩔 줄 모르는 나와는 달리 나머지 두 사람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 커플을 축하하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과는 헤어지고 백남준과의 오찬이 끝날 무렵 나는 조금 전 겪었던 문화적 충격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백남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가 이상하지요? 사랑하는 사람끼리 키스하는 것이 이상할 것 없지요. 이곳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입니다. 특히 우리 예술을 하는 사람은 편견을 가지면 안 돼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아주 모호하고 주관적입니다. 그 사람들은 애초에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비웃거나 비난할 이유가 없지요.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그들대로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존중해주어야지요.”


동성애자들에 대한 판단은 나라마다 사람마다 각양각색이다. 동성끼리의 혼인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국가가 있는가 하면 처벌하는 국가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초로 연예인이 커밍아웃하여 화제가 된 때가 2000년이었고 아직 동성끼리의 혼인은 인정하지 않는다. 백남준은 1990년대 초에 이미 열린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창의적이며 기발한 백남준 작품세계의 첫걸음은 아마도 그토록 열린 사고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 박흥영(1949- ) 연출가. MBC 외주제작센터 전문프로듀서2 국장,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교수 역임. 제1회 호암상 언론상(1991, MBC 교양제작국 인간시대 제작팀), 국무총리상(1993), 한국방송대상 최우수상(1985), 문화공보부장관상(1980, 1981) 수상. 루치아노 파바로티(2000), 호세 카레라스 (2014), 조수미(2010, 2011), 신영옥(2012), 인순이·김범수(2013) 콘서트 연출. 『텔레비전 콘텐츠 제작론』(2013, 양서각)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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