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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낯설수록 절실한

손철주

나는 뻔한 그림이 싫다. 뻔한 그림이란, 자연을 과장하거나 삶을 가장한 그림이다. 과장은 낭만적 허위에 그치고, 가장은 안가한 회피에 머문다. 나는 차라리 낯선 그림이 좋다. 그저 그런 자연이나 삶을, 그저 그렇지 않게 그려서 낯설되, 그 낯설음은 통절한 각성을 일깨운다. 이를테면 이런 그림이 낯설다. 제목이 <와운(渦雲)>이다. 거세게 휘감기는 구름덩어리로 화면을 몽땅 채웠다. 먹구름은 부글부글 끓는다. 우레가 치고 벼락이 떨어져 장대비라도 퍼부을 기세다. 하필 흉흉하기 그지없는 먹장구름을 그린 까닭이 무엇인가.



그림에 사연이 적혀있다. ‘여름 장맛비를 맞으며 그대를 찾아갈 때, 종이와 먹물이 비에 젖어 못쓰게 될까 걱정했지요. 시 한 수를 쓰고 싶었지만 술 취한 뒤에 글씨를 쓰니 구름이 덩어리진 듯합니다. 그림이 이러 하니 웃음거리외다.’ 화가는 짐짓 딴소리한다. 시를 쓰려고 맘먹었는데 술김에 붓을 들자 구름이 되어버렸다? 제 아무리 술 핑계를 댄들 저 음습한 구름이 그냥 그려질 리 만무하다. 가슴에 울혈이 지지 않고서야 나올 턱이 없다. 그린 이는 18세기 문인화가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이다. 이인상은 취한 자의 실언처럼 둘러대고 있지만 내력이 간단치 않다. 명문거족 출신인 이인상은 집안의 명성과 달리 불우했다. 서출이라 종육품 미관말직을 지낸 서러움이 뼛골에 사무쳤다. 경륜 높고 문자속 깊지만 그 뜻을 펼 수 없는 세상은 한탄과 좌절로 점철된다. 자신도 병에 시달렸지만 아들 셋, 딸 하나가 모두 병사하고 아내마저 먼저 세상을 버렸다. 아내에게 바친 그의 제문(祭文)이 비장하다. “나는 기구한 팔자로 태어나 곤궁함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소. 앞으로는 말수를 줄이고, 세속의 교제를 끊고, 번다한 세상사를 정리하겠소.”


우리네 인생사를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장면

그가 남긴 시 한 구절은 이렇다. ‘세상이 혼탁해서 나를 알아주지 못함이여, 잃고 얻는 것이 아침저녁에 달렸구나.’ 내 보기에 이 그림은 한스런 삶에 대한 씻김굿이다. 그림은 요동친다. 응어리진 가슴앓이가 시커먼 구름으로 뭉쳤다가 깊은 시름이 장맛비처럼 쏟아져 내릴 전조다. 잃고 얻는 것이 아침저녁에 달렸다고 그는 말했다. 그것이 구름이 피었다 지는 한순간과 무엇이 다른가. 저 구름에서 쏟아지는 비로 세상의 혼탁한 먼지를 씻어내고 싶었던 것일까. 이인상이 먹장 같은 근심을 숨기며 살았고, 그 근심이 구름 속의 비가 되어 세상을 적시는 광경은 우리네 인생의 파란과 해원이 펼치는 드라마틱한 한 장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와운>은 구름 하나로 곡절 많은 인생사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하되 남의 인생에서 빌려온 소재가 아니라 자기의 일생에서 끄집어냈기에 진정이 보이는 그림이다.


좋은 그림은 너도 나도 좋아하지만, 너도 나도 좋아한다고 좋은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데 모두가 좋아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그 그림 그리기를 한심하게 여긴다. 본 듯해서 익숙한 그림은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편안한 그림은 안락의자와 같다. 앉으면 눌러앉게 된다. 낯선 그림은 불편하다. 그래서 바늘방석이다. 앉으면 벌떡 일어나게 하는, 경각(警覺)효과가 있다. 설혹 그것이 그린 자의 독단과 편견에 가득 차 있더라도 삶에서 깨우친 불편한 진실이 녹아있다면, 보는 자의 공감을 얻는 데 모자람이 없다. 나에게 미술은 낯설수록 절실하다.



손철주(1953- ) 국민일보 미술담당 기자 및 문화부장, 동아닷컴 취재본부장 역임. 현 도서출판 학고재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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