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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몽상을 위한 시간, 건축가 정기용의 스케치

정재은

나는 영화를 만들 때 영화적인 공간의 묘사를 중요하게 여겨왔다. 세트를 만들어 촬영을 진행할 때는 원하는 것들로 공간을 채울 수가 있다. 그러나 현장 촬영은 장면 안에 내가 원하는 것들만을 채워넣기가 참으로 어렵다. 어떻게 보면 세트 촬영보다 로케이션 촬영이 훨씬 어려운 것 같다. 만약 주인공이 일하는 사무실이나 동네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 주인공의 삶 전체를 정하는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로케이션 헌팅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과학이며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영화들을 가만히 떠올려보라. 그 장면들은 주인공들이 거주하고 생활하는 공간의 탁월한 묘사를 통해 주인공을 우리의 친구처럼 여기게 만든 영화들일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영화 속 주인공들의 공간은 점차로 비슷해진다. 아파트들로 빼곡히 들어선 거주 환경과 대기업들의 프랜차이즈로 뒤덮인 획일적 도시에서 주인공들만의 새로운 일상은 존재하기가 참 어렵다. 그러니 영화나 드라마 속 공간은 화려해지고 과장되어 간다.

  

나는 존재하는 것들의 촬영을 통해 이야기의 균형을 찾아 나가는 일이 영화작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영화란 놀라운 창조는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난 좀 더 좋은 이야기를 갈구하면서 나만이 보여줄 수 있는 공간과 환경의 묘사를 영화 속에 구현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도시에서 그것은 참 어렵다. 상상력의 공간을 용인하지 않고 오로지 현실적인 공간만으로 채워진 곳이 바로 우리 삶의 공간이니깐 말이다. 

 


나는 삶의 공간을 보다 밀접하게 다루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건축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한편 만들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화가 <말하는 건축가>이다. <말하는 건축가>는 건축가 정기용이 일민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그의 삶의 철학을 들여다보고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촬영을 지속하며 나와는 전혀 다른 영역을 다루는 건축가 정기용의 모습을 자주 발견하게 되었다. 자세하게 말하자면 수천 점에 이르는 그의 스케치를 뒤지면서 든 생각이다. 일상에 대한 소묘도 많았고 기억 속의 풍경에 대한 그림들도 있었고 여행스케치도 있었다. 다양한 그림들 속에서 내가 흥미롭게 본 그림들은 하나의 도시에 대한 구상안이었다. 일종의 여러 가지 마스터플랜이 나왔다. 누가 의뢰한 것들도 있었고 그저 자신이 꿈꾸는 도시를 그려낸 것들도 있었다. 나는 그 몇 장의 스케치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사실 미술적인 완성도로 평가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그저 낙서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스케치들을 그릴 때의 정기용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바친 무주 안성면에 대한 계획을 보여주는 이 그림은 특히 사랑스럽다. 나름 무주 안성면에 대한 마스터플랜인 것이다. 1999년 3월 17일에 그린 이 스케치는 1/25,000의 스케일로 작성되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다. 나는 이 스케치를 보며 ‘한 번도 꿈꾸어보지도 욕망해보지도 않은 걸 욕망하는 자가 건축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모든 건축가가 이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주어진 도시와 공간에 살며 그것에 의존하여 영화를 찍는다. 건축가 정기용은 빈 땅을 보면서 거기에 사람들의 새로운 삶의 공간을 꿈꾼다. 그 꿈은 한낱 몽상에 불과하고 불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한 남자가 색연필들을 들고 빈 종이에 가득 자신이 꿈꾸는 도시와 공간을 흥분하며 그렸을 그 집중된 순간을 상상해보면,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오고 또 한편으로는 나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또 다른 자아의 열정을 느끼게 된다. 한 인간의 꿈과 몽상과 마스터플랜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는 왜 이런 꿈을 꾸지 못하는 단지 기록하는 사람인가하는 자괴감이 밀려온다. 사실은 어렵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빈 종이 한 장을 펼쳐 들고 뭔가를 계획해보면 되는 것이다. 창에서 보이는 저 건너편 동네를 내가 주무를 수만 있다면 나는 저기에 무엇을 그리고 싶은가? 저 동네에 무엇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는가? 저기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삶이 필요할까? 그저 그런 불필요한 생각들로 종이 한 장을 채워보면 될 일이다. 



- 정재은(1969- ) 한예종 영화과.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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