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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웃음과 기쁨과 눈물은 여전히 우리 곁에

김연수

2007년에 발표한 장편소설『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문학 잡지에 연재할 때만 해도 제목이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이었다. 책을 출판하려고 보니 그 제목이 좀 난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제목을 찾다가 메어리 올리버의 시 ‘기러기’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혼자 몇 번 중얼거려보니까 근사했다. 그래서 그걸 제목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얼마 뒤, 출판사의 편집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표지에 사용하고 싶은 이미지가 있으면 얘기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 제목이라면 당연히 낸 골딘의 사진이죠”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어떤 사진인지 말해줄 수 있느냐고 편집자가 다시 물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서 말했다. “어떤 사진이냐면…… 한 남자가 웃통을 벗고 두 팔로 자기 몸을 감싸는 사진인데……” 그게 바로 낸 골딘의 <Pawel laughing on the beach, Positano, Italy>(1996)라는 작품이었다.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갔을 때였다. 헌책방을 구경하다가 파이돈출판사에서 나온 낸 골딘의 엔솔로지『The Devil’s Playground』를 발견했는데 판형도 크고 모두 화보라 무게가 상당했다. 하지만 이걸 한국까지 들고 가야만 하는가는 고민 같은 건 1초도 하지 않았다. 이전까지는 열화당에서 나온 문고판『낸 골딘』에 실린 조그만 사진들밖에 보지 못했기 때문에 큰 사진들을 보니까 너무나 탐났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책 욕심이 하늘을 찌를 때였다. 그렇긴 해도 내가 진짜 사고 싶은 건 낸 골딘이 1986년에 펴낸 데뷔 사진집『The Ballad of Sexual Dependency』다. 이 사진집을 펴내고 낸 골딘은 가장 친한 친구이자 언더그라운드의 스타였던 쿠키 뮐러와 나폴리로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이게 바로 내 장편소설『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표지 사진이 <Pawel laughing on the beach, Positano, Italy>로 결정된 최초의 계기라고 말한다면 다들 웃으려나.


이 사진은 1998년에 펴낸『Ten Years After: Naples 1986-1996』에 수록됐다. 이 사진집이 나오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1986년, 낸 골딘과 함께 여행을 떠난 쿠키는 나폴리에서 훗날 남편이 될 비토리오 스카파티를 만났다.『Ten Years After』의 첫 부분은 이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로 구성됐다. 여기에는 비토리오의 동생 다니엘의 사진도 있다. 그런데 1989년 쿠키와 비토리오는 에이즈로 사망하고, 다니엘 역시 같은 운명이 됐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 낸 골딘은 다시 나폴리를 찾아가서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 겨울 바다에 뛰어든 포월도 그때 새로 사귄 친구다. 낸 골딘은 막 바다에서 나와 자기 몸을 감싸며 웃음을 터뜨리는 포월을 사진기에 담았다. 그녀는 이 10년 전에 찍은 사진들과 10년 뒤에 찍은 사진들을 모아『Ten Years After』라는 제목을 붙이고 출판한 뒤, 이 책을 쿠키, 비토리오, 다니엘 이 세 사람에게 바쳤다.


사진은 한순간 시간을 동결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인생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진집을 펼칠 때마다 지금은 죽고 없는 낸 골딘의 친구들이 울고 웃고 사랑하고 증오하는 모습이 보인다. 어이없지만 삶은 한 번뿐이며 예수를 제외하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사람은 그래서 외롭다. 네가 누구든 모두가 외롭다. 그럼에도 낸 골딘의 사진에서 찾을 수 있는 이 따뜻한 빛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건 역시 누군가 그 사진을 들여다볼 때마다 그 삶들은 영원히 반복되기 때문이리라. 한 때 그들에게는 웃음이 있었고, 기쁨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다. 그들은 사라졌지만, 그 웃음과 기쁨과 눈물은 여전히 이 세계에 남아 있다. 그들이 죽은 뒤에도 사람들이 웃고 기뻐하고 눈물 흘릴 것이라는 건 거의 확실하니까.


나는 웃고 기뻐하고 또 울겠다. 기묘한 방식으로, 그러니까 웃음과 기쁨과 눈물의 방식으로, 영원히 이 세계에 다시 돌아오는 나를 상상하며. 낸 골딘의 사진 속 사람들이 그랬듯이. 그게 인생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가지는 가장 겸허한 태도니까.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이라고 싯구를 쓸 때, 메어리 올리버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으리라고 나는 또 생각한다



김연수(1970- ) 성균관대 영어영문학 학사.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1994), 제7회 황순원문학상(2007), 제33회 이상문학상 대상(2009) 등 수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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