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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낙서 가득한 페이지

이환권

오늘은 공부하기 싫어, FRP 2007-02, H100×W72×D110cm 


많은 사람이 배고팠던 1970년대. 나는 그 시절에도 빈곤층에 속하던 산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웃들이 많았고 그중에서도 우리 집은 산꼭대기에 가장 가까웠다. 아랫동네에서 공동분배 물을 길어오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난다. 물은 힘겨운 대가였다. 마른날 윗집에서 불그스름한 수지대야에 빨래라도 하고 물을 버리면 골목 아이들은 그 물을 막겠다고 흙댐을 쌓곤 했다. 흙장난은 보통이고, 산과 동네 이곳저곳에 쓰고 버려진 물건들을 가지고 노는 일은 팽이 돌리기나 딱지치기보다 즐거웠다. 더러운 것도 모르고 가난한 것도 몰랐다. 아빠들은 대부분 새벽이나 아침 일찍부터 일터에 나갔고 엄마들은 한 개에 일 이원 짜리 가내수공업을 하면서 살림을 보탰다.

국민학교 4학년이 되어서야 꼭대기 산동네를 벗어나 평지 동네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의 어느 날 중고 자전거를 집에 들였고 다음 날 아침 그제야 실감했는지 너무 두근거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동네도 환경도 나아졌고 마냥 행복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유일하게 자신 있던 과목이 한가지 있었다.
미술.

시간이 얼마나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그리기나 만들기에 빠져 있었다. 동급 친구들과 상관없는 내 스케치북은 교실 벽에 늘 걸려있었고 형과 동생의 미술숙제도 종종 대신해주었다. 형은 좋은 점수를 받아 좋았지만, 동생은 실력이 초과하여 의심의 눈총을 받아 불만이었다. 하지만 부질없는 재주일 뿐 내가 살던 세상에서의 미술은 아 무짝에도 쓸모없었다.

형의 사춘기는 치열했고 나와 다툰 어느 날 형은 내 그림연습장을 통째로 찢어버렸다. 그림 따위는 정말 한심하고 나약했다. 그 후로 다시는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어머니는 소중했던 장난감들을 버리셨다. 이제 공부라는 걸 해야 했다. 더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사실 국민학교도 가기 싫다고 무서운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싶은 걸 참고 다녔다. 학교도 변화도 두려웠다.

머리를 박박 깎고 중학교를 입학한 둘째 날, 담임선생님께서 전날 예고한 대로 쪽지시험을 보았다. 틀린 개수만큼 학생들은 볼기를 맞았다. 공부를 잘하는 녀석이건 아니건 모두 허벅지가 까맣게 멍들었다. 암울했다. 성적이 좋지 못해 남들만큼만 살아보는 게 꿈이었다. 책상 앞에서는 처음의 다짐과 달리 매번 공상에 빠져들었다. 정신이 들고 보면 같은 페이지에 낙서가 가득했다.
‘그놈의 공상…’

방황하던 내게 고등학교 입학 즈음 어머니께서 기타를 사주셨다. 기타는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별 볼 일 없는 이과 3학년 시절. 형은 내게 미대를 추천했다. 난데없는 선택이었지만 좋았다. 대학을 가면 부모님에게 최소한의 의무는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해 얕잡아봤던 미대를 낙방했다. 

재수 시절 나는 삶의 변화를 맞이하였다. 죄책감이 들어 마치 도 닦는 사람처럼 절제 있는 생활을 했다. 나를 알고 통제할 줄 알게 되니 자존감이 커졌다. 대학에 들어가자 10대 시절 꿈꾸었던 음악을 하려고 동아리에서 기타를 쳤다. 남들 앞에 나서지 못하던 내가 무대에도 서보고 나름 진지 했지만, 음악은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어느 날 전공 교수님께서 너는 무엇을 제일 잘하냐고 물어보셨다.
“공상이요”
나는 작가가 되었고 공상은 내 업이 되었다.

Hanging Up The Laundry, 2013, FRP Acrylic Hand Painted, W210×D280×H1910cm


- 이환권 (1974- ) 경원대 미술대학 환경조각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졸업. 세종문화회관 야외개인전 ‘버스 정류장’(2005) 외 개인전 17회, 수원 월드컵경기장 청년작가 야외조각공모전 대상(2002), 2017 김세중조각상 제28회 청년조각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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