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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그의 작업실로 갔다

황호섭

글이 있는 그림(96)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그의 작업실로 갔다. 작년에 몹시도 허리가 아파서 수술했었다는 그는 무척이나 건강해 보였다. 아침부터 흐렸던 하늘은 점심시간 때부턴 영락없는 폭설로 변해 버렸다. 거의 이십오 년 만에 보는 파리의 눈발이었다. 내 친구 P는 80년 초부터 같은 화랑에서 알고 지내던 화가이며, 지금은 미술학교 교수직을 겸하고 있다. 우린 자연히 요즈음 세상사(?)를 반주로 점심을 시작하였다.

25년 동안 같이 살아온 세상이었지만 그사이에 너무나 많이 변해버린 인간들의 감정들을 되돌아보며 지나가 버린 화랑주인 JF님의 회상을 같이 하였다. 그런 화상(畵商)은 이 세상엔 다시 없으리라고, 그이 덕분에 우린 너무나 큰 행복을 느꼈었다고. 친구 P나 난 많이 변해 버린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바뀔 수 없는 하나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많은 사람이 갈 수 없는 길을 가려고 하지만 어느새 친구와 나는 요즈음 미술(너무나도 현실적인)의 경향을 비관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곤 다시 우리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그러나 같이 겪었던 지난날들의 흐뭇함을 다시 불러오려던 우리 둘의 생각은, 다 마셔버리고 비어 있는 포도주잔과도 같았다.




과거의 인류가 오늘날까지 기억될 수 있는 것은 살면서 남기는 하찮은 기록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없다면 생명체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옛날 동굴 속의 벽화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인간이 유일하게 계속 쓰고 있는 색소들이야말로 인류의 역사를 입증하는 가장 위대한 인간의 기록이다.

나는 얼마 전부터 우리가 쓰고 있는 색소 외엔 다른 색소는 없는가? 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본다. 요즈음 누구나 사용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들의 이미지들은 순간의 감각은 즐길 수 있지만 만일 그를 보완하는 힘이 없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인간이 만들고 있는 에너지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예술가 자신이 직접 만들 수 있었던 에너지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이제까지 예술가가 하였던 가장 보편적인 표현만이 다음 세대에도 또 그 다음에도 남아 있을 가장 아름다운 기록일 것이라고, 이제 다시 포도주잔을 채우면서 또 새로운 상상을 하면서 난 새해엔 또 다른 에너지를 찾을 수 있기를 기약하며 친구와 헤어졌다

- 황호섭(1955- )씨는 프랑스 파리국립고등장식미술학교 졸업, 국내외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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