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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나현

빅풋을 찾아서, 문화비축기지, 2022


여느 때처럼 추운 겨울 날씨였다. 전시장 입구 처마에 여기저기 고드름이 열려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 개인전은 주로 겨울이었다. 성수기에 선보일 만큼 인기 있지도 않거니와, 소위 상업적 타산을 맞출 작업도 아니라 극단적인 기간만 피할 수 있다면 비수기 전시에 스스로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있다. 오히려 공간을 제공받고 가능한 지원을 얻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만족한다. 그리고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나는 “전시에 와서 내 작업을 봐주세요”라는 마음과 “내게 관심 두지 마세요”라는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모순적이지만 그렇다.

이번에 개인전을 가진 곳은 70년대 석유파동을 겪은 정부가 유사시 기름을 비축하려고 조성한 거대한 탱크를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곳이다. 원형 탱크 구조도 독특하거니와 세월에 녹아든 흔적과 축적된 공간의 거친 나이테가 매력적이라 이곳에서의 전시를 제안하고 구애한 끝에 전시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높이 14m, 지름 32m의 압도적인 원형 공간 규모에 자칫하면 공간에 허우적대는 전시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걱정도 들었다. 우선 원형 공간 안에 높이 3m, 지름 13m의 원형 막을 설치하여 휑해 보일 수 있는 공간에 내밀감을 높여 전시에 맞는 동선을 만들고자 하였다. 전시장 중심에는 커다란 에어 조형물을 설치하고 그 조형물의 실루엣 정도만 알아볼 수 있는 원형 막으로 둘러싸도록 연출하여 전시장 내벽에는 파노라마처럼 제작된 영상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계획은 그랬다.
다시 고드름이 열린 날로 돌아와 12월 중순, 바짝 추워진 날씨에 이른 아침부터 작품 설치를 시작했다. 기간이 정해져 있으니 그 안에 끝내려면 최대한 시간을 아끼는 것이 중요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져 시간이 지체된 경우를 한두 번 경험해 본 작가들은 이해할 거라 믿는다. 워낙 전시공간이 크고 장비운송을 위해 출입구를 열어두어서인지 난방은 원활하지 않아 보였다. 전시장의 위치도 산속에 은폐된 시설물이라 따뜻한 실내를 기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김포에서 자재를 싣고 출발한 용달차가 도착하자 목재를 안으로 옮기는데 장갑 낀 손가락이 꽤 시렸다. 공감하겠지만 부산한 작품 설치 날의 일반적 풍경이다. 그저 계획대로 기간 내에 안전히 끝나길 바라는 것이 작가의 마음이었다.


개막일의 문화비축기지(좌), 도면(우)


전시장으로 들어온 나는 구조물과 작품 위치 등을 최종적으로 점검하였다. 그리고 원형 막 설치를 위해 지지대를 임시로 세워본 순간 … 원래 총명하지 않은 나였지만, 나이 오십이 넘어서부터는 더욱 흐려지고 뭉뚱그려지는 것 같다. 이렇게 미리 변명을 늘어놓는 이유는 큰 실수가 있음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계획대로 전시장 내부에 높이 3m의 원형 막을 설치할 경우 전시장 벽면을 비추게 될 영상이 원형 막에 가려져 영상 설치도 쉽지 않거니와 관객들은 3m 높이를 넘어 영상을 볼 수 없었다.
사고임을 직감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작업자들은 장비를 챙기며 원형 막 설치를 서두르고 있었다. 열려있는 출입구를 통해 들어오는 냉기가 내 몸과 머릿속의 피를 점점 얼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오류의 수정은 빠를수록 좋은 법. 일단 나는 작업자 모두에게 잠시 따뜻한 커피 타임을 제안했다. 다들 그 커피에 치명적 독(?)이 들어있음을 모른 채 동행했다. 나는 카페에서 일단 작업자들의 환심을 산 후 오류를 고백하고 읍소하며 대안에 대해 설명하였다. 다행히 작업자들도 미술을 전공한 젊은 친구들이어서인지 공감해주고 이해해줘서 수정계획은 수월히 진행되었다. 다행이었다.

작가는 끊임없이 선택하는 사람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머릿속에 그려지거나 가슴에 담긴 그 무엇의 완벽한 구현을 위해 끊임없이 수정하고 선택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이제까지 세상 밖으로 나와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작가 자신도 허점투성이 인간이라 짐작만 할 뿐 결과를 완벽하게 예측하지 못한다. 완성의 순간도 작가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그 완성이 번복되는 것 또한 부지기수며 그 번복도 작가의 선택이자 용기이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 끝없는 작가의 변덕과 여기에 스스로를 사유의 미로에 빠트려 헤어나오게 하려는 가학적 행위가 작업의 여정이다. 이 번복을 통해 작가의 사유와 작품의 내용이 더 넓어지고 풍요로워지는 게 아닐까.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현대미술은 결과물보다 작업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에 더욱 눈과 귀를 집중하지 않나 생각한다. 과정 또한 작품이다. 작가로서 나의 이야기가 미학과 비평의 범주에는 포함되지 않을 수 있지만, 내 생각에 동의한다면 당신도 다채로운 여정을 담고 있는 하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 수 있다.


빅풋을 찾아서, 문화비축기지, 2022



- 나현(1970- ) 홍익대 학사, 영국 옥스포드대학 순수미술 석사. 2015 올해의작가상 후원작가, 2016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2020 하종현미술상 수상. 프로젝트 중심의 작업으로 국내외 개인전 개최 및 단체전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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