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52)연암으로 다시 보는 미술

최형순

몇 년 전인가,『열하일기』를 읽으면서도 뭔가 건져낼 여유가 그땐 정말이지 없었다. 체할 만큼 급히 읽은 탓에 머릿속에는 이야기의 흐름 한 조각조차 담아 놓을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연암 박지원의 예술론과 산문미학: 비슷한 것은 가짜다』를 만났다. 행운이었다. 미술에 걸려있는 많은 생각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미지는 살아있다”, “까마귀의 날갯빛” 같은 제목뿐만 아니라 장원언의『역대명화기』, 왕유의 <산수론> 인용이나 정선(鄭敾)의 인물 그리기에 대한 예에 이르기까지 미술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 말이다. 그중에 우리에게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미술에 대한 생각이 있다는 것엔 적잖이 놀랐다. 그것은 그저 조그만 실마리 하나라도 발견되면 무엇의 효시라고 크게 과장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중국 당대의 왕유가 “먼 것은 작고 가까운 것은 크다.”, “먼 것은 흐리고 가까운 것은 진하다.”고 했다고 그거야말로 최초의 원근법에 대한 설명이라고 흥분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말은 맞다. 그야말로 선 원근법과 공기 원근법을 각각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그걸 원근법에 대한 설명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도 또한 누구나 알고 있다. 서양이라고 르네상스 이전에 원근법적인 그런 생각조차도 못했을 리가 있겠는가?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에만 하더라도 원근법적 회화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원근법에 대한 생각은 꼭 아니더라도, 미술에 대한 연암의 생각은 놀라운 면이 적지 않다.


이건 어떤가? 색에 대한 생각이 지극히 현대적이다. 현대미술의 시작이 인상주의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색을 다루는 태도에 있어서의 혁명이었다. 색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의 작용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사물마다 고유한 색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모네(C. Monet)는 시시각각 변하는 색을 따라 다른 그림을 그렸다. 19세기 말의 인상주의에 와서야 가능해진 색에 대한 사고와 비교해 연암이 말하고 있는 것을 보라. 아! 저 까마귀를 보면 깃털이 그보다 더 검은 것은 없다. 그러다가 홀연 유금빛으로 무리지고, 다시 석록빛으로 반짝인다.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떠오르고, 눈이 어른어른하더니 비취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해도 괜찮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또한 괜찮을 것이다. 저가 본디 정해진 빛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버린다. 어찌 그 눈으로 정하는 것뿐이리오. 보지 않고도 그 마음으로 미리 정해버린다.



아! 까마귀를 검은 빛에 가둔 것도 충분한데, 다시금 까마귀를 가지고서 천하의 온갖 빛깔에다 가두었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검다. 그러나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르고 붉은 것이 그 빛깔 가운데 깃든 빛인 줄을 알겠는가? 검은 것을 일러 어둡다고 하는 자는 단지 까마귀를 알지 못하는 것일 뿐 아니라 검은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물은 검기 때문에 능히 비출 수가 있고, 칠은 검은 까닭에 능히 거울이 될 수가 있다. 이런 까닭에 빛깔 있는 것치고 빛이 있지 않는 것이 없고 형상 있는 것에 태가 없는 것은 없다. 

- 연암 박지원,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

 

까마귀를 보며 “저가 본디 정해진 빛이 없다.”고 한다. 모네가 살펴본 자연과 다르지 않다. 모네가 시시각각으로 그린 낟가리들을 러시아의 칸딘스키(W. Kandinsky)가 감동으로 지켜봤던 그 눈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색채란 오직 빛의 반사에 불과하다. 빛이 없다면 무슨 색이 있겠는가? 게다가 빛에 따라 변하는 걸 경험하는 것이 어려운 것도 아니다. 해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하늘을 배경으로 나뭇잎의 색깔이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한번 지켜보라. 초록색 나뭇잎은 해가 비칠 때 아주 희게 반짝인다. 해가 들어가면 어떨까. 초록색으로 보일까? 밝은 구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나뭇잎은 검은 점처럼 하늘을 가린다. 나뭇잎은 확실히 고유한 색을 지닌 것이 아니라 빛에 따라 이런 정도로까지 색이 변할 수 있다. 그래서 모네가 루앙성당, 포플러, 낟가리를 새벽과 아침, 낮, 저녁 또는 밝은 날과 흐린 날의 그림들로 각각 다르게 캔버스를 바꾸어가며 그린 것, 또는 햇빛이 구름 속에 가려지면 같은 조건이 될 때까지 기다린 것은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그렇게 색이 빛의 작용에 불과함을 확인하며 그런 미술에 승리를 안겨준 것이 현대에 이르러서인데, 일찍이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르고 붉은 것이 그 빛깔[色] 가운데 깃든 빛[光]인 줄을 알겠는가?” 빛의 작용이 색이라는 것. 빛과 색의 관계를 이렇게 일찍 밝혀 말한 경우를 예전에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최영순(1963- ) 홍익대 미학 박사(수료). 구상전 평론상(1998) 수상. 강원일보사 기자, 모란미술관 학예연구사, 박수근미술관 학예연구사 역임. 현 전북도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