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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소리에 대한 소고

한만영

아파트에서 살다 작업실과 살림집을 짓고 이곳에 정착한지도 20여 년이 되어온다. 처음 이곳으로 이사 오기로 마음먹은 것은 학교와 인사동(시내)이 가깝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조용하고 전원적인 풍경에 매료되서다. 간혹 손님들이 방문하면 절에 온 것 같다고 하며 조용한 동네 풍경에 놀라워들 한다. 가끔씩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가 유일한 공해처럼 느껴지는 한적한 곳이다. 모든 소리는 움직임과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풀 벌레 소리, 새들의 지저귐, 나뭇잎 사이를 빠져나온 바람 소리 등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삶의 희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아침마다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FM 라디오를 켜는 일로부터 하루가 시작된다. 고전음악이 나와도 좋고 재즈가 흘러나와도 좋다. 베토벤도 모차르트도 요한 스트라우스의 왈츠도 기분 좋다. 그러나 그레고리안 성가나 레퀴엠 같은 곡에서 많은 위안과 평온을 느낀다. 문득 장송곡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산자를 위로하는 음악이라는 누구인가의 해설에 공감한다. 인간들은 각종 소리를 재현하고 창조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왔다. 소리를 재현하고 창조하는데 악기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 타악기는 인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원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는 구원의 메시지가 되어 널리 퍼져 나아갔을 것이다. 비탄에 젖은 이에게는 위안이고 환희에 도취된 이에게는 축복의 종소리다. 관악기는 말초적이고 현악기는 매우 비현실적인 동시에 몽환적이다. 하지만 이 모두 인간의 감성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없을 것이다. 케르베로스도 하데스도 감동시킨 오르페우스도 하프로 냉혹한 절대적 질서의 틀을 해체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천상이 아닌 이상 아름다운 노래 소리만 듣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요즈음 공동주택에서 층간 소음문제로 불행한 일들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순간의 감정을 억제 못해서 살인까지 이어지는 소음 문제는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소음 문제가 비단 공동주택에 국한 되는 것은 아니다. 조용하기로 소문난 이곳도 요즘 소음 문제로 고통 받고 있다. 담장을 경계로 하고 있는 거대 기업 회장 저택이 2년 넘게 신축중이다. 중장비가 굉음을 내면서 움직이자 기존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철거가 끝나고 암반을 제거하는 기초 공사로 이웃들의 불안은 극에 달했고 골조 공사가 끝나가며 서서히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위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건축주가 지금쯤은 건축가의 명성과 조감도에 현혹되었던 것을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국내 건축계에서 지명도가 높다는 이 저택을 설계한 건축가를 쾰른 근교 작은 교회(Bruder-Klaus-Feldkapelle)로 안내한다. 10여 명도 들어가기 어려운 작은 교회지만 건축 설계를 의뢰받고 몇 년의 고뇌 끝에 피터 줌터는 4원소를 모티브로 건축에 착수했다. 건축 시공은 지역 주민들의 농한기를 이용한 봉사로 이루어졌고, 건물 거푸집은 이 지역 자생 나무 기둥을 인디언 천막의 구조를 유기적인 형태로 빈틈없이 이어갔다. 건축물의 형태가 견고하게 굳어 졌을 때 거푸집을 불태워 제거하는 과정이 나무 표면의 질감과 함께 고스란히 화석처럼 남아있다. 불의 축제와 퍼포먼스가 끝났을 때 미니멀한 외관과 포스트모던적인 내부 공간이 창출됐다. 완공된 교회 천장에 작은 구멍이 생겼고 물방울 모양의 구멍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우주가 보인다. 그리고 그곳을 통해 빗물도 바람소리도 관통한다. 피터 줌터의 자연을 관조하고 환경을 응용하는 건축 철학이 빛을 발한다. 교회는 드넓은 밀밭과 숲을 배경으로 한 풍경 속에 작은 아름다움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외형만으로는 도저히 교회 건물이라고 믿기 어려운 이곳을 방문하는 전 세계 관광객은 의외로 많다. 주차장에서 내려 교회까지 가는 동안 밀밭 위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을 좇다 보면 가쁜 숨을 내쉴 수밖에 없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십자가는 비표처럼 출입구 위에 부유한 채 붙어있다. 어두운 교회 안으로 들어서면 천정으로부터 쏟아지는 한 줄기 빛으로 교회 안 풍경이 환영처럼 피어난다. 거푸집으로 사용했던 112개의 나무 기둥이 불에 타오르며 내뿜는 소리, 천장에서 떨어지는 빛 물소리가 섞여 환청처럼 아련히 들려온다. 

 

멀리서 들려오는 뻐꾸기울음 소리에 현실로 돌아온다. 이제 인내하기 어려운 중장비 소리는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각종 공구소리로 소음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 저택 공사로 인한 소음은 1년 후, 아니 그보다 빠르거나 늦어질 수도 있겠지만 집이 완공되면 소멸될 소음이란 희망이 있기에 감내 할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이 없을 때는 어찌 해야 될까. 신축 중인 이 건축주와 같은 집안의 또 다른 이웃 재벌기업 회장댁(?) 가족들이 외출 후 귀가할 때마다 20-30미터 전방에서 자동차 경적을 울린다. 그 경적으로 대문이 열리고 수위들의 부산한 영접을 받는 광경을 이따금 목격한다. 이 집 식구들이 귀가할 때마다 생산해 내는 소음은 이 집주인이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이 생기거나 이사를 가지 않는 한 끊임없이 울려 퍼질 것이란 사실이 암담하다. 오디세우스는 선원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의 몸은 돛대에 묶어두고 사이렌의 유혹(=파멸의 노래 소리)을 극복하고 귀환에 성공한다. 이 경적 소리를 사이렌의 노래 소리로 인지하고 오디세우스처럼 대처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한만영(1946- ) 홍익대 회화과, 건국대 대학원 졸업.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작품 출품. 현 성신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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