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74)집, 작가를 기억하는 방식

조은정

5월 4일은 조각가 권진규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이날이면 어김없이 성북구 동선동 언덕빼기에 있는 그의 집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드나들고 작업실 중앙에는 해바라기가 놓인다. 2008년 5월 이후 한결같은 그 날의 풍경이다. 무사시노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활동하던 권진규는 부친이 서거하자 가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1959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모시고 살 집을 손수 지었다. 천장은 커다란 기념 조각을 제작할 수 있도록 당시로써는 획기적이라 할 만큼 높게 하였고, 한쪽 벽에는 2층을 만들어 작품보관과 커다란 작품을 만들 때 운신할 수 있는 폭이되는 공간을 만들었다. 또 실내에는 우물을 파고 가마를 들여 테라코타를 구울 수 있도록 하였다. 이곳에서는 극한의 고통을 보여주는 동시에 중세적인 둔탁한 두광이 부담스러워 인수를 거부하였던 동네 교회에서 부탁한 예수상이 권진규의 마지막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까지, 웬만한 조각가들이 하나쯤 제작하였다던 기념조각은 결코 그 천장에 닿을 일이 없었다. 공공조각의 시대에 권진규는 개인의 초상을 작품으로 만들다가 그렇게 1973년 자신의 생을 자신의 집에서 스스로 거두었다. 지금 한국 미술사에 우뚝 선 그의 입지는 당시에는 없었다. 


고희동가옥 아틀리에, 사진제공: 한국내셔널트러스트


1918년, 고희동은 종로구 원서동 창덕궁 담과 맞닿은 곳에 집을 지었다. 직접 설계한 집은 한옥 구조에, 방과 방은 실내에 설치된 복도가 이어주었고 현관에는 서양식 신발장이 설치된 절충식이었다. 근대기 한옥과 양옥, 일본식 집의 장점을 조합하여 만든 그야말로 근대적인 집을 축조한 것이다. 이곳 최고의 장소는 단연 주인장인 고희동의 사랑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작업실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찾아온 손님들을 맞아 술잔을 기울이던 곳이다. 오세창, 김돈희, 이도영, 최남선, 박한영 등과 함께 가진 한동아회(漢洞雅會)에서 시끌벅적한 웃음과 시취가 넘치던 곳도, 내로라하는 미술인들이 회갑연을 빌미삼아 모였던 곳도 바로 이 방이었다. 천장이 높은 방에는 항상 사방에 그림이 붙여져 있었고 미닫이를 밀어 문을 닫으면 방문까지도 벽의 역할에 적격인 곳이었다. 하지만 1959년 하반기 어느 때쯤 고희동은 경제난으로 가족을 이끌고 이 집을 떠나 제기동 개량주택으로 거주처를 옮겼다. 근대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가 후학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던 바로 그곳이 미술사에서 사라져간 지점이었다.


이 최초의 서양화가의 집이 다시금 세상에 드러난 것은 한샘이 디자인연구소와 주차장을 짓기 위해 고희동 가옥을 허물려 한다는 사실이 사건화한 것 때문이었다. 시민들의 운동과 종로구청의 노력 덕에 고희동이 지은 집은 종로구가 구입하여 수복을 거친 후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운영을 위탁받았다. 권진규 집은 오랫동안 비어 있다가 동생 권경숙이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함으로써 대대적인 수리가 이루어진 후에 레지던시 시스템을 도입하여 권진규 아틀리에로서 기능하고 있다. 1959년에 탄생한 집, 같은 해에 주인이 떠나간 집은 모두 ‘예술가의 집’으로서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운영을 맡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최근 권진규 아틀리에에서는 새로운 입주작가가 작업을 시작한 반면, 고희동 가옥에서는 전시 중인 묘비가 추방되었다. ‘집’에 무덤의 묘비를 가져왔다는 것을 금기시한 부처의 처사였다. 관리자들이 라디오를 틀어 유행가를 듣고, 식사 시간에 맞추어 찌개 냄새 풍기는 ‘살아있는 집’의 공간으로서 고희동 가옥에 대한 인식이라면 환영할만한 일이기도 하겠다. 권진규를 존경하는 작가들이 경쟁을 통해 입주의 자격을 따내고 새로운 작품탄생의 산실로 삼는 권진규 아틀리에에서도 물론 식사시간이면 반찬 냄새는 퍼질 것이다.


공간을 살아있게 하는 것은 그곳에 깃들인 이들의 마음이자 태도에 있다. 작품과 달리 작가가 거주하고 제작의 혼을 불태웠던집을 통해 우리는 작가를 기억한다. 작가의 집은 그래서 통로로써의 기능을 갖추어야 한다. 운영비가 들어가는 시설물로서 접근할 대상이 아닌 말 그대로 공공재로서 문화적 재원인 것이다. 역사가옥박물관의 미래가 선뜻 그려지지 않는 것은 지자체장이 바뀌면 언제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보이지 않는 조직의 문화적 무지에 대한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조은정(1962- )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 박사. 한남대 대학원 겸임교수, 소마미술관 운영위원. 석남을 기리는 미술이론가상 수상(2013),『권력과 미술』,『한국조각미의 발견』등의 저서와「한국전쟁기 북한미술인의 전쟁경험에 대한 연구」,「이승만동상연구」 등 다수의 논문.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