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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인생의 멋을 즐기셨던 나의 은사, 이대원 선생

조일상

보통 은사라고 하면 오랫동안 학업을 이끌어준 스승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나의 은사이신 서양화가 이대원 선생과는 몇 번의 짧은 만남만으로 내 삶의 길잡이가 되어준 특별한 인연이 있다. 대학 시절, 나는 전공이 달랐기 때문에 선생의 수업을 들을 일이 없었고 캠퍼스 멀찌감치에서 마주치는 게 다였다. 그때 이대원 선생에 대한 첫인상은 분홍 와이셔츠를 입고 손수 자가용을 운전하는, 서구 문화를 체득한 깔끔하고 세련된 모던보이였다. 그렇게 선생에 대한 이미지를 쌓아가던 중 가까이서 만나게 된 때는 학과 일로 꾸중을 들을 일이 생겨, 당시 이대원 선생이 계셨던 교무처장실에 들어가게 되었던 날로 기억한다. 그 날이 잊혀 지지 않는 것은 그 방 자체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1997년 겨울, 부산 송도 구름다리를 건너면서 찍은 사진,

좌) 조일상, 우) 이대원 선생님


여느 연구실과는 달리, 방 안에 사선으로 비스듬히 놓인 책상은 그 당시로는 처음 보는 가구 배치였는데, 또 그 위에 모과를 담은 목그릇이 단아하게 놓여 있어, 구질구질한 것 없는 방안에서 모든 시선을 사로잡았다. 깔끔하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독특함에 가히 놀랐던 것이다. 그 후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고, 영어에 능숙했던 이대원 선생으로부터 영어수업을 듣게 되는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영어수업보다는 수업 중간중간 간간히 들려주신 한국미에 관한 이야기들이 더욱 흥미로웠다. 단순히 옷 잘 입고 신문화에 대한 정보를 빨리 습득하는 모던보이가 아니라 한국 음식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고 전통미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진정한 멋쟁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교정 안에서 이대원 선생과의 인연을 끝으로, 나는 학업을 마쳤고 부산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러던 중에 선생과의 인연이 다시 시작된 것은 1977년 부산에서 열렸던 동문전 때였을 것이다. 사석에서 만난 지라 선생과 좀더 가까이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그 이후에 한도룡 선생을 따라 이대원 선생의 작업장에 방문할 기회도 얻었다. 선생의 작업장에는 3번 정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처음 방문했을 당시, 작업실 입구 벽에 대패 서너 개를 함지박에 담아 걸어둔 것을 보고 또 한 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훌륭하고 유명한 작품이었던들 액자를 끼운 유화작품이 걸려 있었다면 아마 그리 놀라지도, 이토록 오래도록 기억에 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작업실 안에는 강원도에서 가져온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편하게 앉아 차도 마시고 담소도 나눌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 벽에 방비를 걸어둔 것이 신기하여 물어보니, 하동 빗자루라시며 지역마다 빗자루의 모양과 색깔이 달라 어느 작품보다 진미가 있다고 덧붙여주었다. 내가 조형성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뜬 계기가 있다면 그때일 게다. 오방색의 실을 꼬고 엮어 부드러운 선맛을 살려내며 차리하게 떨어지는 빗자루에서 느끼는 감흥은 놀라운 것이었다. 선생은 그런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내게, 내 전공과 관련하여 우리나라 전통적인 공구들, 특히 목조형과 관련이 있는 대패를 모아보면 어떻겠냐고 조언해 주었다. 그 말이 뇌리에 박혀, 그 후로 줄곧 골동품을 모으게 되었다. 그런 취미는 한국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데 큰 가르침이 되었다. 또 모으다 보니 그것이 내 작품의 주요한 테마가 되어 주었다. 고리타분하다고만 여긴 옛것에 대한 새로운 보기를 선생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내가 기억하기로 선생은 일상적인 사물을 통해 길러낸 미감을 먹는 것, 입는 것, 그림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 다방면으로 확대하여 인생의 ‘멋’을 즐기었던 분이다. 그러한 선생의 여러 면모는 나의 작품관과 더불어 지금의 내 삶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러 은사 중에서도 인생의 ‘멋’을 가르쳐 주었던 이대원 선생은 나의 진정한 은사, 요즘 말로는 인생의 멘토가 아닐수 없다.


파주 작업장에 꼭 놀러 오라 하셨는데, 바쁜 일을 핑계로 못 찾아뵌 것이 두고 후회가 되어, 서거 1주년 때 한도룡 선생과 함께 제자 몇몇이 모여 비석을 만드는데 동참하였다. 진정한 은사에게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보답의 길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올해 10주기를 맞으며 더욱 그립다



조일상(1946- ) 홍익대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 졸. 동아대 예술대학 학장 및 교수(1973-2012),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대학 연구교수(1985, 99), 부산미술협회 이사장(1995-97),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등 역임. 개인전 6회(1973-2003), 국전 추천작가(1979). 제 27회 국무총리상(1978)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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