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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이경성 선생의 리플렛 한 장, 신사실파 이규상을 증언하다

황정수

돌이켜보면 한국 미술에 깊이 빠지게 된 결정적인 순간은 ‘신사실파(新寫實派)’를 알게 된 그날이었던 것 같다. 특히 이규상(1918-64)의 작품은 ‘순전한 추상화가’라는 느낌과 함께 고급스러운 화면은 나의 빛나는 우상이 되었다. 신사실파, 모던아트 등 그가 활동했던 그룹에 대해 공부하며, 어느 덧 그의 작품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원래 과작이었던 그의 작품은 현전하는 것이 워낙 적었다. 오죽하면 국립현대미술관조차 한 점도 소유하고 있지 못할 정도니, 개인이 소유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이규상, <생태 11>


간절하면 이루어진다 했는가. 존재하지 않을 것 같던 선생의 작품이 기적같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이루어졌으니, 하늘이 내린 행운이었다. 소묘를 얻은 것도 특별했지만, 유화를 얻게 된 것은 더욱 극적이었다. 10여 년 전 어느 날, 이규상 선생의 작품을 감정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작품을 보게 된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찾던 선생의 작품으로 대표적인 도상(圖像)을 그린 것이었다. 출처를 묻자 의사였던 부친이 미술평론가 이모씨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동안의 선생에 대해 가졌던 마음을 터놓고, 운명 같으니 양도하기를 청하였다. 소장자의 양보로 그토록 원하던 작품이 비로소 나의 수중에 들어왔다. 금전적인 어려움은 있었지만 상쾌한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규상 선생의 작품과 필자는 이렇게 운명처럼 만났다. 


2015년 8월 어느 날,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 근대 미술과 미술자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규상 선생에 대한 생각을 나누게 되었다. 궁금한 것이 많은데 자료 좀 보여 줄 수 없느냐 부탁하였다. 특히 1963년 개인전의 리플렛이 보고 싶었다. 몇 점이 전시되었으며, 작품의 제목은 무엇이라 하였는지 궁금하였다. 리플렛을 받아 펼쳐보니 도판은 없고, 작품의 제목과 점수가 적혀 있었다. 출품작은 25점이었으며, 제목은 모두 <생태(生態)>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리플렛은 특별하게도 주인이었던 이가 기록한 전시 작품의 특징이 부분적으로 적혀 있었다. 출품된 작품 중 7점의 작품을 간략히 그려 놓고 각 작품의 주된 색깔을 적어 놓았다. 특징을 잘 잡아 그려 놓은 그림들은 원래의 작품을 추정하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전문가의 솜씨였다. 이 중에는 현재 전하는 작품의 설명도 여러 점 있었다. 이를 살펴보던 필자는 열한 번째 작품의 특징을 기록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필자의 소장품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위쪽에 별과 달을 의미하는 듯한 도상이 있고, 아랫 부분에는 땅을 의미하는 듯한 도상이 있으며, 위편의 배경이 노란색으로 되어 있다는 설명은 바로 다름 아닌 필자 소장의 작품이었다. 놀라운 마음에 상기된 표정으로 김달진 관장에게 물었다. “이 리플렛은 어떻게 구하게 된 것입니까?”


이규상 개인전(1963) 속 면


“아, 이거요. 이경성 선생님께서 기증해주신 것입니다.” 참 놀라운 일이었다.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이 단번에 해결되는 순간이었다. 이 작품은 1963년 개인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이었으며, 제목은 <생태 11>이었다. 그리고 평론가가 가지고 있었다는 말은 이경성(1919-2009) 선생이 소장하고 있었던 작품이라는 의미였다. 비슷한 연배이며 홍익대학교에 같이 근무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듯 미술품의 소장 경로는 조그만 미술자료 한 장으로 규명되는 경우가 많다. 이경성 선생이 전시회에서 작품의 도상을 기록해두지 않았다면, 이규상 선생의 <생태 11>의 전승 경로는 전해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한 개인의 애정으로 보관된 전시회 리플렛 한 장이 미술사의 역사적인 한순간을 기록한 사초(史草)가 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전시회 자료 한 장 한 장이 보존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미술자료가 보존되어야 하고 미술자료박물관이 존재해야 하는 것은 어느 역사의 기록 못지않게 중요한 일임을 생각하게 한다.



황정수(1961- ) 홍익대, 연세대 대학원 국어국문학 전공. 전 홍익여고 교사, 옥션단 이사(2010-12), 『경매된 서화』(2003)와 논문 「소치 허련의 <완당초상 >에 관한 소견」(2005)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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