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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크리스토의 <포장 국회의사당>: 포장이 공공미술로 전환되기까지

김승호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 드로잉 ⓒChristo


삶과 미술, 사물과 작품, 민주주의와 공공미술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다듬는 아방가르드 미학. 그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누구나 한번쯤 접하는 포장이 공공미술로 거듭났고, 크리스토(Christo)와 잔 클로드(Jeanne-Claude)는 독일 국회의사당을 포장한 작품으로 판매도 소유도 불가능한 미술작품을 선보였다. 〈포장 국회의사당(Wrapped Reichstag)〉은 공공미술프로젝트를 넘어 최근 독일이 겪고 있는 난민문제, 아방가르드 미학도 살펴볼 기회이기도 하다.국회의사당 포장작업은 작가인 크리스토와 조직자이자 기획자인 클로드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포장한 건축물과 프로젝트는 역사적으로, 미학적으로 의미가 증가되기 마련이다. 1894년 르네상스 양식으로 완공된 건물이 1933년 화재와 2차대전 때 폭격으로 심하게 파괴되었고, 통독 이후 수도인 베를린으로 국회의사당이 이전하면서 ‘독일의 역사에 관한 질문’도 이곳에서 첨예화 되었다. 보수와 개조 후 세계적인 건축물로 선정된 베를린 국회의사당1)이 현대미술과 손을 잡으면서 21세기형 공공미술이 탄생하여 역사적인 아방가르드와 네오아방가르드 사이의 미학적 논쟁에서 남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도 투명하게 했다. 


베를린과 인연이 깊은 크리스토.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면서 냉전분위기가 첨예화되자 그는 자신을 공산주의 국가(불가리아)에서 망명한 작가라고 소개하고 조국이 없어서 여권이 없다면서 그 사건을 미술사 범주로 수용한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베를린 장벽을 막는 드럼통으로 〈철의 장막〉 이라는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잔 클로드와 크리스토가 1995년 독일 국회의사당을 포장하기까지 23년이라는 세월이 걸린다.2) 당시 국회의장인 리타 슈스무트의 도움으로 662명에 달하는 국회의원들에게 서신과 통화를 통한 설득이 있었다. 그들의 계획을 반대한 정치인은 헬무트 콜(전 총리)과 울프강 쇼이블레(현 재무장관) 등 이었다. 국회에서는 이 사안을 투표로 붙이게 되고, 1994년 2월 25일에 찬성 292표, 반대 223표, 중립 9표, 무효 1표로 〈포장 국회의사당〉 프로젝트는 의회에서 승인을 받는다. 부부작가는 100,000m²의 알루미늄으로 코팅한 소방용특수방화천, 15,600m의 산악용 끈을 뮌스터의 제조회사에 주문한다. 라이프치히 근교 타우카의 비에리-천막회사에서 사용목적에 따라 재단하고 형태에 맞춰 제작한다. 1995년 6월 17일부터 7월 7일 철거에 이르기까지 클로드는 기획력을 발휘한다. 6월 17일부터 6월 24일까지 정치의 1번가이자 역사적 상징인 건축물이 미술작품으로 변신하여,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포장할 때의 현장은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아침에 햇빛을 받으면서 90명의 산악전문가들이 건물의 꼭대기에서 내려오며 국희의사당을 포장하는 장면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과 같았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 한복판에서 픽션이 아닌 퍼포먼스가 실제로 일어났고, 단 한번 밖에 경험할 수 없는 이 사건은 미술사에 기록된다. 이는 마치 서울의 광화문과 근정전 혹은 남북을 가르는 철책선이 미술작품으로 포장된다고 상상하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2주 전시기간에 5백만 명이 수도를 방문했고, 전 세계의 방송국과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독일 국회의사당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공공미술작품으로 기억되었다.


크리스토는 국회의사당을 포장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희망과 민주주의의 상징적 표현”과 함께 저작권에 관한 선례도 남겼다. 2002년에 한 출판사가 포장된 국회의사당을 그림엽서로 발간하여 판매하면서 크리스토와 법적 다툼이 불거졌다.3) 크리스토 부부는 출판사를 상대로 출판 및 판매금지 소송을 걸었다. 법정은 2002년 1월 24일, “해당 프로젝트는 시간적으로 한정된 프레젠테이션으로서 프로젝트의 이미지는 라이선스 없이는 공공연하게 출판해서는 안 된다. 개인목적이나 언론보도는 규정에서 제외된다.”라며 작가의 손을 들어준다. 〈포장 국회의사당〉은 소유도 상업성도 불가한 프로젝트다. 누구도 소유할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입장료를 요구할 수 없는 공공미술에 속한다. 작가도 주최 측(국회 포함)도 소유할 수 없는 미술작품으로서 21세기형 자유의 상징이다. 자유는 소유를 거부하고 소유는 동시에 지속을 의미하여 미술작품이 지속된다. 바로 여기, 아방가르드 논쟁에서 제외된 건축과 미술, 정치와 미술작품, 민주주의와 공공미술, 나아가서는 최근 독일의 난민정책과 예술정책 사이의 고리가 오늘날과 미래의 작가들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하지 않은가.



1) Andreas Biefang: Die andere Seite der Macht. Reichstag und Öffentlichkeit im „System Bismarck“ 1871–1890. Berlin, 2009, p.139-298. 


2) 부부작가는 1971년 마이클 컬렌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 -국회의사당을 포장하는 것을 제안함-를 받는다. 그에게 승인을 얻기 위한 조건을 부탁한 그들은 1972년 국회의사당을 포장한 최초의 꼴라쥬 작품을 제작한다. 1976년 베를린의 국회의사당 건물을 관찰한 그들은 국회의장인 안네마리 랭거를 설득한다. 국회의원들과 지속적인 대화에도 불구하고 후임 국회의장인 칼 카스텐스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간다. 이듬해 함부르크에 국회의사당포장 프로젝트를 위한 큐레이터모임을 결성하고, 수차례 방문과 1980년 국회의장인 리차드 슈특클린과 대화를 하였지만 돌아온 답은 반대였다. 1981년 10월 4일 윌리 브란트 수상이 뉴욕의 작업실을 방문하면서 재논의 된다. 수상의 긍정적인 의견에도 불구하고 라이너 바르젤 후임 국회의장이 반대로 다시금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자 1986년 베를린 시장인 에버하르드 디프겐이 다시금 뉴욕의 부부작가를 방문하고 70.000 찬성하는 시민들의 사인을 국회의장인 필립 예닝게에게 제출했지만 결국 탈락의 고배를 마신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이 통일을 이루자 1991년 국회의장인 리타 슈스무트는 크리스토에게 도와줄 것을 서신으로 약속한다. 1992-1993년 독일을 방문한 부부작가는 포장된 국회의사당의 모델을 베를린 국회의사당과 서독의 본Bonn 국회의사당의 로비에 전시한다. 울프강과 실비아 볼츠와 마이클 컬렌은 크리스토를 국회의원들에게 소개했고 국회의원 사무실을 방문하여 대화와 설득을 한다. 23년간 기나긴 투쟁의 역사가 기록된 이 프로젝트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3) 출판사는 공공공간인 거리나 도로 혹은 공원에 있는 작품들은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사진촬영 및 상업화는 저작권법 조항에 위배되지 않고, 미술작품으로 존재하는 동안 공공공간임을 주장함.



김승호(1962- ) 독일 알베르트루트비히프라이부르크대 및 동대학원 미술사학 전공, 철학 박사. 독일 국립중앙미술사학연구소 국책연구원 역임, 홍익대, 이화여대, 한예종 등 출강. 헤럴드 한국문화경영대상 수상(2014). 『제3의 한국 현대미술, 그러나 어떻게? 』(한국학술정보, 2014)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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