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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자취 없이 사라지는 자의 꿈은 무엇인가

손철주

은둔을 노래한 도연명의 ‘귀거래사’는 고향 가는 자의 기쁨으로 충만하다. 도연명은 고작 다섯 말의 쌀(五斗米) 앞에 머리 조아려야 했던 하급 관리의 비루한 나날을 내쳐 던졌다. 은둔 길로 나서며 휘갈긴 그의 문장 2천4백 자는 행간마다 환호작약한다. ‘...돌아가야 해. 바라건대 더는 사귀지 말고, 더는 휩쓸리지 말아야지. 세상과 나는 서로 잊어버리자. 다시 수레에 올라 무엇을 얻을까 보냐...’ 돌아갈 곳이 있는 자의 은둔은 축복이다. 그렇지, 도연명에게는 맞아줄 고향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만사를 포기할 수 없어 붙들린 자는 어떠한가. 그가 밤새 고통과 치욕으로 머리통을 쥐어박을 때, 은둔은 그의 여생을 위로할 수가 없다. 그가 꿈꾸는 은둔은 가혹한 희망에 불과할 터. 세 라 비! 은둔은 낭만에 가득 찬 낙향이 아니다. ‘귀거래사’는 1600년 전의 망향가일 따름, 은둔은 오히려 비장한 소멸에 가깝다. 본시 은둔의 뜻을 상고하니 그러하다. 옛 기록을 따라가면 ‘삭적(削迹)’이란 말이 나온다. 삭적은 ‘수레바퀴의 흔적을 지운다’는 뜻이다. 두보의 시에도 나오고, 멀리는 공자의 전기와 장자의 우화에도 보인다. 수레를 타고 천하를 정처 없이 떠돈 공자의 높은 뜻은 불우했다. 그는 노나라에서 쫓겨나고, 위나라에서 흔적이 말살되고(削迹), 제나라에서 곤궁하고, 진과 채나라에서 사로잡힌 신세였다. 받아주는 이 없어 몸 누일 곳을 찾지 못했다. 걸어온 이력이 자취 없이 사라지는 고초 속에서 그는 자기 소멸의 예감 때문에 우울했다. 흔적이 지워지니 소멸이요, 소멸하는 자는 은둔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은둔은 몸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몸을 지워버리는 행위다. 은둔의 미학이 비장미인 연유다.



간밤의 흔적을 지우고픈 욕망은 술꾼과 바람둥이들만의 것이 아니다. 예술가에게도 그런 욕망을 닮은 버릇이 있다. 자신의 작품을 어느 순간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싶은 충동에 치를 떠는, 그리하여 마침내 이승에서의 호적을 깡그리 파내 버리고자 하는 자기 소멸의 욕구가 그것이다. 이른바 삭적이다. 살아서 단 한 점이나마 걸작을 남기는 것이 예술가의 지상 목표라 할 때, 지난날 남긴 작품들이 한 순간 태작에 불과하다고 느끼는 것은 둔재의 모멸감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 반성일 수도 있다. 자못 흥미로운 건 그 다음에 펼쳐질 그들의 선택이다. 절치부심일까, 두문불출일까, 아니면 가뭇없는 사라짐일까. 

 

조르주 루오는 자기 작품 3백여 점을 자기 손으로 불태운 화가다. 저간의 사정은 이렇다. 1917년 화상 볼라르가 루오의 아틀리에에 쌓인 작품을 입도선매한 뒤, 루오는 무려 30년 동안 전전긍긍했다. 그는 자신이 팔았던 작품을 완성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볼라르 뿐 아니라 그의 상속자까지 상대로 한 지루한 법정 소송 끝에 그는 작품을 되돌려 받았다. 작심한 그는 대중이 보는 앞에서 그 많은 작품을 불 싸질렀다. 그 광경이 장쾌한 퍼포먼스일 리는 만무했다. 동석했던 법정 관리와 미술 애호가들은 경악했다. 루오는 소각 사건 이후로 아틀리에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입 막고 귀 막은 은둔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그것으로 진정을 인정받고자 했다. 불태운 작품 중에는 실제로 서명하지 않은 초안도 있었다. 멀쩡한 작품은 더 많았고, 수집가들은 그 작품들을 사고자 눈에 불을 켰다. 루오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작품이 사라지면서 육신의 흔적마저 사라지길 바라지 않았을까. 미제레레!


이문열의 단편 「금시조」도 마지막 장면은 작품 불태우기다. 스승 석담에게서 서법을 배운 고죽은 죽음을 앞두고 스승과의 갈등을 회고한다. 석담은 서도를 강조했고, 고죽은 서예를 선호했다. 도와 예는 고죽의 내면에서 충돌했다. 생전에 쓴 자신의 글씨를 다시 거두어들인 고죽은 삭적을 선택한다. 불타는 작품 속에서 그가 본 것은 용을 잡아먹는 새, 가루라였다. 그것은 예술의 궁극으로서의 환영이었다. 흔적을 지우는 행위가 곧 예술의 지상에 이르는 길이 될 때, 흔적을 만들어낸 삶의 이력은 고통일까, 환희일까. 고죽은 행복하게도 삭적과 법열을 동시에 구현한 예술가였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는 어떤가. 주인공은 말더듬이다. 그의 어눌함은 소통할 상대를 찾지 못하는 한 ‘내출혈’이거나 ‘고독’이다. 그는 금각사의 지독한 아름다움에 혼을 뺏긴다. 그러나 금각사는 접근을 거부하는 미학의 성채였다. 금각사는 세상과 소통하기 어렵거나 소통하지 않으려 하기에 존재한다. 소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아름다움이란 글쎄 뭐라고 해야 좋을까. 그건 충치 같은 거야. 혀에 닿아 걸리적거리고 아프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주장한단 말이야. 끝내 아픈 것을 참을 수 없어 치과에 가 충치를 뽑아버리지.” 소설의 주인공은 파멸의 충동에 이끌려 끝내 금각사에 불을 지른다. 그는 발치(拔齒)에 성공했다. 그러나 통증에서 해방됐는지 알 수 없다. 삭적은 옥석을 가리지 않는다. 함께 태운다. 오히려 작가인 미시마 유키오는 소설 밖에서 삭적을 수행했다. 그가 외친 구호의 섬뜩함을 용서한다면, 그는 자위대 본부 옥상에서 할복으로 생을 지운 것이 맞다.


예술가가 아닌 우리는, 살아서 무엇으로 삭적의 비장한 아름다움을 맛볼 것인가. 생활의 고통과 치욕으로 머리를 쥐어뜯는 장삼이사에 그칠지라도 살아있음의 축복에 복받쳐서 천수를 누리면 그것이 행복인가. 나는 비장미를 찾아 헤매는 어리석음과 무모함을 꿈꾸고 있다. 



손철주(1953- ) 국민일보 미술담당 기자 및 문화부장, 동아닷컴 취재본부장 역임. 현 도서출판 학고재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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