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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뜨거운 태양의 나라, 스페인 미술관 기행

노형석

지난 6월 초 필자는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있었다. 1주일간 이곳 도심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서 개막한 중견 사진가 배병우씨의 개인전과 레티로 공원 수정궁에 펼쳐진 작가 김수자씨의 설치 작품전(둘 다 7월 중순까지)을 취재했다. 한국의 토종 소나무 사진들이 내걸린 티센 미술관과 공원의 환상적인 거울못 설치 작업 현장을 르포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지만, 사실 관심은 내내 다른 쪽에 가 있었다. 이 땡볕의 도시 한복판을 거닐며 ‘미술사의 백과사전’인 프라도, 소피아 미술관 등의 명화들을 포식하겠다는 ‘욕심’에 나는 마냥 들떠있었던 것이다. 마드리드 여정은 여행자의 감성과 이성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노천 문화가 뿌리깊은 마드리드의 일상을 즐길 요량이면 마요르 광장이나 태양의 문, 그란비아 거리의 카페, 백화점을 가는 게 좋다. 문화와 예술에 젖고 싶다면 카스티야 대로의 미술관 거리를 섭렵하거나 레알 왕궁 근처를 돌아다니면 된다. 방대한 현지 예술유산들은 빡빡한 관람 스케줄을 짜도 섭렵했다는 느낌을 얻기가 쉽지 않다.


필자에게 배당된 6박 7일간의 일정은 고도 톨레도와 티센 뮤지엄, 저 유명한 프라도와 레이너 소피아 뮤지엄, 북방 소도시 빌바오로 이어졌다. 피로와 식탐, 유희의 욕구, 비장감 따위가 뒤섞인 여정이었지만, 태양빛처럼 내내 뇌리를 맴돈 건 프라도에서 본 거장 고야와 벨라스케스의 명화들이 던진 잔상들이었다. 프라도 미술관 정문 앞에 팔레트 들고 앉은 벨라스케스의 좌상을 지나쳐 들어간 2층 전시실. 중앙 홀에서 ‘근대회화의 문턱’이라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보았다. 17세기 궁정 풍경 속에 관객들도 등장인물로 밀어 넣어버리는 거장의 집요하고 냉철한 시선과 부딪혔다. 인간의 야수성, 잔혹성을 까발린 고야의 <검은 그림> 연작과 대작 <1803년 5월 2일> 앞에서는 발을 떼지 못했다. 눈가에서는 르네상스부터 바로크, 낭만주의까지 세계 근현대미술사의 명화들이 별처럼 명멸했다. 망막에 자국을 남기고 스쳐간 거장의 이름만 20명은 넘을 듯싶다. 엘 그레코, 무리요, 브뤼겔, 라파엘로, 틴토레토, 루벤스, 푸생, 로랭, 와토, 보티첼리, 젠틸레스키, 보쉬 뒤러... 거기에 레이너 소피아와 티센에서 만난 숱한 19-20세기의 근현대 거장들은 또 어떻게 머릿 속에 챙겨 넣을 것인가.


19세기말부터 20세기 현대미술을 망라하는 레이너 소피아 미술관. 타피에스, 달리, 미로, 이브 클라인 등의 몇몇 작품만 머릿속에 넣은 채 전시를 다 보지도 못했다. 불행하게도 피카소의 <게르니카>와는 인연이 없었다. 게르니카 반환 25돌을 맞아 소피아, 프라도 미술관이 피카소 걸작들을 재정리하는 기획전(6월 6일-9월 30일)을 준비 중인 탓이었다. 마드리드 삼대 미술관인 프라도, 레이너 소피아, 티센 보르네미시아는 ‘황금의 삼각 편대’를 이룬다. 불과 오륙백 미터 거리를 오가며 서양미술사를 중세부터 현대까지 편력할 수 있다. 세 미술관은 절묘하게 컬렉션을 보완한다. 중세부터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시대까지의 명화들을 프라도에서, 19세기 말-20세기 초, 최근까지의 근현대 모던, 컨템포러리 아트는 레이너 소피아에서 섭렵할 수 있다. 반면 티센 보르네미사는 프라도와 소피아에는 별로 없는 17세기 네덜란드 시민사회의 정물·풍경화와 19세기 인상파, 20세기 러시아 추상주의와 독일 표현주의 회화들을 대거 소장하고 있으니 멋드러진 조합이 아닐 수 없다.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

미술사 기행은 엘 그레코의 대작들과 아라건축 유산 ‘무데하르’가 어우러진 옛 도읍 톨레로,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구겐하임 미술관의 ‘은꽃잎 건축’이 있는 북부도시 빌바오로 이어졌다. 빌바오 구겐하임에서는 러시아 미술사 순회전과 조우했다. 16세기 성화 아이콘부터 19세기 레핀의 걸작, 20세기 초 러시아 추상주의, 스탈린 시대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90년대 이후 카바코프의 설치작업까지 러시아 미술사를 종단한 영양가 만점의 전시다. 구성주의 작가 타틀린의 수병 그림 앞에서 색조의 결을 관찰했던 기억이 남는다. 서유럽풍 가로와 옛 성당이 놓인 구시가, 강 하구에서 조망한 검푸른 대서양, 빌바오 강 양안을 잇는 대형 케이블 운반기의 모습도 겹쳐진다.


돈키호테처럼 얼빠진 표정으로 누볐던 스페인 예술 편력기는 대개 태양빛을 받으면서 시작되어 태양을 등지면서 끝이 났다. 예술도 일상도, 삶도 죽음도 투우처럼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곳, 눈에 명룧게 육박해오는 단도직입적인 이미지들의 카오스로 채워진 나라가 스페인이다. 어느 책인가에서 본, 스페인 시인 로르카의 경구가 떠오른다. “스페인 사람들은 벽 속에 갇혀 살다가 죽는 순간 햇빛 아래로 나온다... 그들의 삶과 죽음은 생생하다...” 올레!



노형석(1968- ) 홍익대 미술사학과 석사(수료). 현 한겨레신문 기자 및 문화부 대중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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