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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여러 번의 발걸음, 하나의 응시

유영소



김아타, 온에어 프로젝트 019-DMZ 시리즈 “8시간”, 2003/2006, 
크로모제닉 컬러프린트, 179×238.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3월 13일에서 8월 13일까지 진행된 국립현대미술관 신소장품전이 막을 내렸다. 반년에 걸쳐 ‘삼라만상: 김환기에서 양푸둥까지’라는 제목으로 지난 4년간(2013-16) 수집한 작품 중 130여 점이 전시되었다. 5월에 한 번, 8월에 두 번 전시장을 찾았다. 대규모 전시이긴 해도 같은 전시를 세 번 찾은 것은 처음이다. 물론 의도적이었다. 언젠가 예술작품 감상과 관련된 짧은 예화를 들었는데 그 감상법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던 그간의 태도가 탐욕스럽고 피상적이라는 깨우침을 주었다. 이전까지 미술관에 들어서면 전시된 작품을 전부 봐야 한다고 믿었고 원칙처럼 지켰다. 관람객이 몰릴 때는 한 작품 앞에 3초 이상 머물기도 어려웠다. 관람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했고, 마음을 끄는 작품을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과감하게 나머지를 포기하지도 못했다. 본전을 뽑으려는 심리였을까? 소장품이 수 만점에 달하는 해외 박물관에 가서는 한 점이라도 더 보려고 전시장 안을 달리다시피 하였으니 눈은 보았는데 마음이 가닿지 못했다. 

기억하는 것은 현장에서 본 그 형상, 그 색조가 아닌 화집이나 인터넷에서 본 이미지뿐. 반면 이야기 속 할아버지는 손자와 나란히 전시실 의자에 앉아 단 하나의 작품을 말없이 오랫동안 응시한다. 해설 없이도 작품을 가슴으로 감상할 수 있었던 어린 소년이 무척 부러웠다. 단 한 번이라도 눈이나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작품을 이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5월 초여름 첫 번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방문했을 때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김아타의 사진 작품이었다. 그 후에 두 번 더 갔을 때는 오직 이 작품 하나만 보았다. 미술관에 전시된 김아타의 사진은 세 점이었지만 시간을 들여 집중해서 본 것은 <온 에어 프로젝트 019-DMZ 연작 “8시간”>(2003/ 2006) 하나였다. 한 컷의 사진에 담긴 푸른 하늘은 여느 하늘과 다름없어 보였으나 실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8시간 동안의 하늘이었다. 감쪽같이 이음매 없는 한순간을 가장한 하늘과 달리 바람에 흔들린 나무들의 윤곽은 표현주의 화가의 거친 붓 자국을 연상케 했다. 장시간 미동도 하지 않고 피사체를 응시하는 카메라의 눈은 끊임없는 흔들림을 낱낱이 포착하고, 무수한 이미지들이 겹치고 겹쳐 나무와 나무 사이, 숲과 나무 사이의 경계가 모호한 회화적 풍경을 낳았다. 8시간을 담은 한 컷. 이 기묘한 풍경을 보고 있으려니 고전적 규범이 된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81)의 이론에 의구심이 든다. 그는 회화의 고유성이 ‘함축적 순간’의 재현에 있다고 보고, 연속적인 시간 표현에 제약을 지닌 공간 예술로 규정하지 않았던가! 김아타의 장노출(Long Exposure) 사진은 순간의 재현이 아님은 물론이고 어떤 회화도 순수한 순간의 재현이 아니다. 캔버스 바탕으로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 붓질의 산물이며, ‘함축적 순간’이라고 부르는 표면 아래 중첩된 시간의 흔적과 무게를 담고 있다. 8시간 장노출 사진이 회화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시간을 경유한 이미지의 중첩 때문이 아닐까? 

공중에 흩날리는 티끌처럼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건물만 남은 김아타의 뉴욕 사진은 속도에 비례하여 빠르게 사라지는 존재들을 극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데도 상대적으로 평범한 DMZ 사진이 유독 시선을 사로잡은 까닭이 무엇일까? 세 번으로는 답을 찾기에 부족했다. 그렇다. 세 번은 많은 것이 아니라 아주 적은 시간이다. 한 컷의 사진은 8시간을 펼쳐 보여 주지 않는다. 중첩된 시간은 맥락을 은폐한다.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쉬울 리 없다. 그나마 전시장을 들락거리는 동안 남은 것이 있다면 흐릿하게나마 마음속에 새겨진 그 영상이다. 전시는 끝났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푸른 하늘과 한데 뒤섞여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의 영상을 떠올릴 수 있다. 이제 표를 끊지 않아도 된다. 보고 또 보면 알게 될지도 모른다. 8시간 동안 카메라가 본 것을.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이 첫눈에 마음을 사로잡은 까닭을.


- 유영소(1966- ) 홍익대 서양화과 졸업. 동대학원 미학과 박사. 주요 연구 분야는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주의 미학과 예술작품 해석학. 『키에르케고어와 예술』(사문난적, 2017) 지음. 현 홍익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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