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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미술관 권력과 오디오 가이드

신승철

거대한 미술관에서는 길을 잃기 마련이다. 전 세계의 수많은 작품을 모아 놓은 미술관은 보통 그 규모 이상으로 복잡하다. 시대순으로, 또는 지역별로 등장하는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길을 잃기 일쑤다. 간혹 보이는 안내 부스에서 길이라도 물을라치면, 안내원들은 한결같이 오디오 가이드를 권유한다. 아마 그들은 오디오 가이드가 작품과 공간에 익숙지 않은 이국 관람객에게 가장 효율적인 관람 수단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미술관의 소소한 장치는 눈에 띄지 않지만, 관람 방식에 큰 영향을 준다. 거대 미술관의 수많은 작품을 누가 일일이 관찰하고 기억할 수 있겠는가? 오디오 가이드는 큐레이터가 제안하는 효율적인 동선을 보여준다.



본 도판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첨부되었으며 칼럼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습니다.


오디오 가이드는 1950년대 미국과 유럽에서 일반화됐다. 전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미술관 관람객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던 시기였다. 어쩌면 반대로 전시 관람 기술의 변화가 관람객 수 증가에 기여했을 수도 있다. 당시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 대부분은, 블로그와 SNS상의 정보로 무장한 현대인보다 훨씬 무지했다. 그들은 라디오 수신기에 의존해 미술관을 돌아다녔다. 미술관은 정해진 시간에 전파를 송신했다. 모든 관람객이 같은 시간에 설명을 들어야 했고, 단체로 장소를 옮겨 다녔다. 새로운 기술 장치는 전시 방식을 변화시켰다. 전시기획자들은 단체로 몰려다니는 관람객이 극적인 변화를 경험하도록 신경을 썼다. 가끔씩 스펙터클한 장면이 연출됐고, 보편적인 정서 반응을 염두에 두고 작품이 배열됐다. 기술 장치가 전시 ‘풍경’을 바꾸어 놓고, 청각이 시각을 통제하는 시기가 그렇게 시작됐다.

라디오 가이드는 몇 가지 기술적인 문제로 명맥을 잇지 못했다. 녹음의 질이 좋지 않았고, 비용도 문제가 됐다. 녹음된 내용이 반복 재생되는 동안 음질은 더욱 저하됐고, 내용은 지루해졌다. 새로운 내용을 재녹음하려니 다시 비용이 문제가 됐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전파 송출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는 점이다. 방송 시간을 놓치면, 그것이 다시 시작될 때까지 마냥 기다려야 했다. 라디오 가이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오늘날 새로운 청각 장치가 여전히 미술관을 점령하고 있다. 우리는 개인화된 오디오 가이드만이 아니라, 스마트폰 앱에 의존해 미술관을 돌아다닌다. 특히 각처의 유명 미술관은 팟캐스트 제작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들은 공들여 방송을 제작하고, 전시가 끝난 이후에도 데이터를 삭제하지 않는다. 전시장에 가지 않아도, 작품을 보며 해설을 들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는 분명 관람객 서비스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전시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졌지만, 그만큼 작품 해석에 대한 미술관의 권위 역시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덕분에 팟캐스트 제작과 송출이 쉬워진 오늘날, 많은 이들이 비공식적인 전시 가이드를 만들어 배포하고 있다. 유명 미술관에서는 사설 관광 안내원이 손님을 모시고 다니며 작품 설명을 하기도 한다. 미술관의 권위는 소장품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지식과 해석에서 나온다. 그래서인지 미술관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듯하다. 제국주의와 함께 시작된 박물관 제도와 그 권력이 비판받는 오늘날, 청각 장치는 친절한 안내인이면서, 동시에 효율적인 정보 통제 수단이 된다. 전시장에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감상한다. 그리고 보통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해석한다. 하지만 셀 수 없이 많은 작품과 복잡한 동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거대 미술관에서 ‘무지한 관객’의 존재는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

- 신승철(1975- )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석사, 베를린 훔볼트대학교 철학박사.『바이오 아트: 생명의 예술』(미진사, 2016)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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