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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① ‘새로운 회화’: 회화 위기론에서 비롯된

반이정

2019 ①
‘새로운 회화’: 회화 위기론에서 비롯된  


반이정 미술평론가


회화의 복귀 배경

미디어아트와 다매체미술은 주류 미술을 대표한다고 믿어지며 주요 전시의 초대작품들을 보면 이는 상당 부분 사실로 확인된다. 이미 떠오른 이 매체미술들은 주목받는 미술가의 라인업을 형성하기도 하며, 이런 흐름은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대세였다. 그렇지만 정확히 연도를 확정짓긴 어려워도 대략 2010년 전후 어느 무렵부터, 주요 미술공모전에 후보자와 수상자의 명단에 평면 회화 작가들이 오르는 경우가 부쩍 많아졌다. 이 같은 회화 강세는 일시적인 복고 취향으로 해석하긴 어렵다. 회화의 역습은 미술의 변화, 나아가 전에 없던 새로운 회화의 출현으로 보는 편이 맞다. 


새로운 회화의 동향을 정리하는 전시들도 2015년을 전후로 꾸준히 기획 되었다. 20대 중반부터 40대 초반 사이의 평면 회화가들 중에서데 선배 회화 작가 6명(강석호, 김지원, 노충현, 유근택, 최진욱, 홍승혜)의 추천을 받은 13명(김민호, 박종호, 백경호, 왕선정, 유한숙, 장재민, 전현선, 정유선, 정은영, 조송, 최수연, 최정주, 허수영)의 회화 세계를 살핀 <두렵지만 황홀한>(2015.2.27.-6.5 하이트컬렉션)과 평면이라는 조건과 재료를 새롭게 발전시킨 작업에 주목한 <평면 탐구: 유닛, 레이어, 노스탤지어>(2015.11.27 – 2016.01.31. 일민미술관)이 그렇다. 또 회화라는 전통 매체를 여전히 의미 있는 장르로 조명한 <현대 회화의 모험: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2019. 09. 26~ 2020. 0329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도 다양한 매체 미술의 각축장에서 미술의 원점인 평면 회화가 살아남는 현장을, 회화의 새로운 흐름을 통해 주목한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이라 할 수 있다. ‘종근당 예술지상’은 제약 회사가 지원하는 미술상으로, 여느 미술상과는 달리 선정 작가의 기준을 평면 회화라는 장르에 한정시켜서, 회화 미술상이라는 차별점으로 자리매김했다. 







장르적 한계를 넘어선 미디어아트와 다매체미술 그리고 다원미술이 비엔날레 같은 미술계의 초대형 행사에서 주인공으로 출현한 지는 이미 오래 되었지만, 매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매체 환경의 변화는 미술이라는 유구한 장르의 정의도 재규정하도록 압박했다. 예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회화의 외형’으로는 동시대 정서와 호환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회화는 우리가 전에 알던 회화들과는 다른 얼굴을 지닌 ‘새로운 회화’다. 특히 뉴미디어와 온라인문화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2000년 전후로 출현한 어떤 회화에선 전에 없던 미적 시도들이 관찰되었다.  


새로운 회화

평면 회화의 복귀에는 크게 세 가지 배경이 있는 것 같다. 미디어아트와 다매체미술이 전시장 전체를 장악한 비엔날레의 관람을 통해 지속적으로 누적된 피로감이 있다. 미디어아트에 비해 오히려 뉴미디어 세대의 미감이나 정서와 교감하는 새로운 회화들은 동시대성을 지닌 미술로 평가될 수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격년제 미술행사 비엔날레가 그 수는 늘었으되, 활력은 이전과 같지 않은데 반해, 예전이 비해 다양하게 분화된 아트페어들이 미술계의 권력 지형에서 새로운 강자로 출현한 것은 분명하다. 아트페어의 본질이 작품의 매매에 주력하는 미술 견본시장에 가까울 수 있지만,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와 그것을 소비하는 관객 모두에게 회화 편중 현상을 이끈 건 분명하다. 난해한 실험에 치중해서 소통에 전적으로 소홀했던 ‘비엔날레형 미술’과는 달리, 판매와 직결될 수 있는 미술품은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를 만족시켰고,  아트 페어의 부상은 자연히 회화의 부상으로 연결되는 견인차가 되었다. 


회화를 구상/추상으로 나누는 구분법은 동시대 미술 현장에선 시대착오적이라는 인상을 줄 만큼,  구상/추상이라는 용어의 사용 빈도가 높지 않다. 그럼에도 동시대 회화에도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 추상에 적합한 회화가 있고, 구체적인 대상을 묘사한 구상에 적합한 회화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렇지만 주류 미술계에서 회화를 지칭하거나 평가할 때 ‘구상’이나 ‘추상’라는 분류로 예전만큼 따르지는 않는 편이다.  

지금의 ‘새로운 회화’가 이전 회화와 다른 점을 꼽자면, 구상 또는 추상으로 나누는 기준으로 그림과 그 안에 담긴 ‘스토리’사이의 관계를 본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정의에 따르면 구상과 추상을 구분하는 가장 단순한 기준은 스토리의 유무라 할 수 있다. 추상미술을 지지하는 대표 이론은, 스토리를 문학의 요소로 간주하고 스토리가 미술의 순수성을 훼손하므로 그것을 화면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동시대의 새로운 회화에선 구상/추상과 스토리가 맺는 관계는 역전되어 나타나고 있다. 동시대 새로운 회화에선 구상이건 추상이건 스토리가 기본적으로 결핍되어 있거나, 화면을 구성하는 동기부여 그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해서 구상적 회화조차 스토리가 역할이 매우 낮다. 반면 추상적 회화에선 우연적인 스토리가 화면을 구성하는 동력으로 쓰인다. 


추상: 포스트 인터넷 세대의 미감

추상을 서구 모더니즘 미술의 신호탄이자, 20세기 중반 미술계의 국제 브랜드로 이해하는 건 1950년대 전후부터 지금까지 우리 미술계의 기본 인식이다. 한국 미술계에 모더니즘이 도입된 시점을 국내 화단에 추상미술이 출현한 시기로 정하는 이유도 그런 배경 탓일 게다.

추상미술의 종말 이후로도, 2000년대에도 추상적인 외형을 갖춘 동시대 미술작품은 흔하게 발견되고 있다. 하지만 동시대 미술의 추상 충동의 동인은 과거처럼 ‘매체의 순수성’ 같은 미적 도그마인 적이 없다. 동시대 미술에서 추상적 외형을 지닌 작품이 출현하는 동인은 포스트 인터넷 세대의 시대감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 

20세기 현대 미술계가 추상미술을 매체의 순수성이라는 도그마와 결합시켜서 절대화한 데 반해, 21세기 동시대 미술계에 출현하는 일견 ‘추상적 외형’을 지닌 미술은 추동한 요인, 즉 추상 충동의 동인으로 포스트 인터넷이라는 동시대성을 지목하려 한다.


추상미술의 종말 이후로도, 추상적인 외형을 갖춘 동시대 미술작품은 흔하게 발견되고 있다. 하지만 동시대 미술의 추상 충동의 동인은 과거처럼 ‘매체의 순수성’ 같은 미적 도그마인 적이 없다. 또 다종다양한 추상의 외형을 띤 작품들은 평면에 국한되지 않고 평면 입체를 오갈 뿐 아니라, 단 하나의 고유한 매체에 예속되지도 않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동시대에 출현하는 추상적인 작업에 대해 더는 ‘추상’이라는 미학용어로 표현하거나 묘사하려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처럼 동시대에 추상이라는 호칭/표현이 지양되는 까닭은 추상이 이미 ‘구시대의 미감’을 함의하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동시대 작가들에게 추상의 외형을 지닌 작품은 각양각색의 형식실험 끝에 우연히 당도한 귀결점에 불과할 뿐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이 모더니즘 시대의 추상미술과, 동시대에 ‘추상의 외형’을 지닌 미술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리라.


40여년 전 출현한 한국 모더니즘 추상 작품이 지금 현실에서 뒤늦은 전성기를 누리게 된 동인이 미술시장의 수요 때문이지만, 동시대 미술에서 추상적 외형을 지닌 작품이 출현하는 동인은 포스트 인터넷 세대의 시대감성으로 설명될 때가 많다. 선배 세대의 추상이 서사에 대한 부정이 전제된다면, 동시대에 추상적 외형을 지닌 작품은 그 배후에 구체적인 서사가 관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구체성이 결여된 다종다양한 문양들로 전면을 채운 우태경의 회화는 물경 1세기 전 추상회화의 맹아로 출현한 구성주의 회화나 초기 입체주의 회화와 연결될 수도 있다. 형언 불능의 단위들로 화폭의 전면을 채운 점에서 닮았다. 그렇지만 입체주의 회화는 재현 대상을 정육면체(큐브 cube)라는 단위로 재구성한 것이고, 추상의 전성기를 형성한 20세기 초중반 추상회화는 격자무늬(그리드 grid)라는 표준 단위를 갖고 있었다. 이에 반해 우태경의 추상회화를 구성하는 단위에는 통일된 표준이 없다. 흐르는 물결, 나뭇가지, 전파의 형상, 만개한 꽃봉오리 등등으로 유추할 수 있으나 정확히 지목하기 어려운 다양하게 단위들이 그림을 구성한다.


형언 불가의 무정형 추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화면에 가까이 다가가면 캔버스 곳곳에 인쇄된 작은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특정한 단어로 인터넷 검색을 해서 이미지 파일을 수집하고 그 파일의 ‘부분’들을 캔버스에 산발적으로 인쇄하는데 그 ‘부분’들이 캔버스 전체 화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도 안 된다. 그 1%의 색점으로부터 작가가 제멋대로 여백을 채워 넣는 결과가 우태경의 추상화다. 요컨대 <Parasitic painting(p.p) 기생하는 작업 19>(2016)에 선택된 키워드는 ‘두근두근’이라는 부사다. ‘두근두근’이라는 임의적인 키워드 검색으로 스타벅스 로고, 일본 현찰, CGV 로고, 맥도날드 아이스크림, 비행기 차창에서 내다본 바깥 풍경 등 서로 연관이 전혀 없는 이미지가 200 여점 가량 수집됐다. 작가는 이 중에서 임의로 선택한 이미지를 캔버스에 인쇄한 후, 개별 이미지의 형태와 색채로부터 다종다양한 형상을 뽑아 여백을 채웠다. 그렇게 채운 우태경의 무정형 패턴 회화들은 일견 전체적인 유기성이 퍽 높아 보이나, 개연성이 서로 낮은 이미지들의 총합인 점에서 서사의 일관성을 포기한 ‘자율적인 회화’다. 이처럼 전에 없는 회화 제조법은 SNS가 형성시킨 새로운 정서, 뉴미디어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미감, 인터넷 세대 고유의 미학을 재현하는 점에서 포스트인터넷 미술의 한 경향으로 풀이될 게다. 논리적인 인과관계와 상관없이 단속적으로 나열해서 얻은 ‘우연한 시각적 결과물’만으로 전에 없는 미학을 선취하는 점에서 말이다.


윤향로가 자신의 회화를 위해 고안한 '유사회화'라는 조어는 미술계 안에서 꽤 잘 먹히는 분위기다. 회화라는 구시대 매체를 열세로 밀어붙인 동시대 시각매체들의 표면을 ‘유사하게’ 흉내 내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시킨 그녀의 작업이 종래 회화의 대안처럼 느껴졌을 수 있다. 일견 회화 같기도, 판화 같기도, 출력 인쇄물 같기도 한 윤향로의 회화는, 단번에 어떤 공정으로 제작되었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만화를 구성하는 대사, 인물 등 중요한 요소를 지우고 움직임을 표현하는 동작선 따위만 남긴 만화책의 페이지 수십 장을 중첩시켜 단 하나의 화면으로 완성하는 그녀의 그림은, 일견 서사를 생략한 전형적인 추상 회화처럼 보인다. 만화의 구성을 아는 누구건 그녀의 추상 화면으로부터 만화의 요소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스토리와 전후 맥락을 생략하고 ‘만화 장르의 시각적 특성’만 남긴 그녀의 ‘말 없는’ 화면들은 동시대인에게 이심전심의 감정을 전달하리라. 전후 맥락을 생략하고 부분만 확대시킨 윤향로의 또 다른 연작 <스크린샷Screenshot>도 서사가 실종된 추상화지만 동시대의 문화 감각이 표면에 새겨졌다.


동양화 전공자 이정배는 대학에 입학한 직후에야 인터넷이라는 ‘전에 없던’ 사이버 세상을 체험한 세대다. 인터넷과 뉴미디어의 디지털 시각체험을 새로운 창작과 연결시키는 미감이 포스트 인터넷 세대의 것이라면, 20대가 되어서 인터넷을 접한 이정배 세대는 물리적 재료를 오프라인에서 직접 만져 결과물을 완성하는 걸 신뢰하지만, 온라인에서 취득한 시각 자료를 결정적인 보조 수단으로 활용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F.R.P와 레진으로 완성된 단조로운 무정형으로 벽에 납작하게 붙어 전시되는 이정배의 작품은 평면과 입체라는 장르적 사유가 무력해진 틈에 등장한 새로운 미술이다.


이정배의 연작 <공원>은 일견 예쁜 색상으로 마감된 하드엣지한 평면 입체물로서, 어떤 시각적인 서사의 단서를 추론하기 힘든 추상 덩어리다. <공원> 연작은 세느강, 노팅힐 공원, 여의도 공원, 센트럴파크 산타모니카 공원처럼 세계 명승지들이 직사각형의 외형을 고수하는 것에 착안해서 도시계획이 통제와 관리를 위해 사각형과 직선으로 최적화되었음을 일련의 작업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포스트 인터넷의 무정형 미감

‘재현’이라는 미술 고유의 기능을 자진해서 포기한 실험이 현대미술사에서 전성기를 누린 시대가 있었고, 미술의 현대성(모더니티)이 곧 추상이라고 등식화 되었던 시기였다. 미술의 최종 단계를 추상으로 이론화한 도그마가 비슷한 시기에 전 세계 화단에 추상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추상의 황금기는 끝났고, 매체의 순수성이란 명분으로 추상을 정당화하는 이론은 누구도 더는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어떤 것도 재현하지 않는 시각예술이 동시대 미술계에 꾸준히 출현한다. 다만 추상의 외형을 지닌 이런 미술 행위에 대해 ‘추상’이라는 구시대 명칭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동시대에 출현하는 ‘추상’ 닮은 미술 중 일부는 포스트 인터넷 세대가 동시대성을 개진하는 방편으로 심심치 않게 소환되는 것이다.


추상 황금기를 누린 모더니즘 세대가 재현을 포기하면서 작품 제목을 ‘무제’로 통일시킨데 반해, 추상의 외형을 지닌 동시대 미술을 이끄는 동력은 구체적인 사연이 배후에 깔려있다. 이미지 과포화 시대를 통과하며 얻은 체험이 구체적인 사연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회화가 재현이라는 고유 기능을 자진해서 포기한 모더니즘 시대 이래로, 회화는 새로운 길을 탐색해야 했다. 동시대 미술에서 추상적인 외형의 작품의 출현은 뉴미디어와 인터넷을 체험한 세대가 앞선 세대와는 차원이 다른 미감을 체험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구상: 이야기가 실종된 회화 

동시대 화단에서 떠오르는 구상회화의 양상을 한두 줄로 간추리긴 어렵지만, 가장 두드러진 기본 속성을 꼽자면 여태껏 구상회화의 기본 요소였던 이야기의 실종 또는 결핍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구상회화의 준거를 부인하는 것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구상의 외형을 지니고 있다.  스토리의 유무에 따라 회화를 구상과 추상으로 나눠온 간편하고 오랜 구분법이 있음에도, 오늘날 구상이나 추상이라는 명칭이 흔히 쓰이지 않는 이유는, 스토리를 매개로 ‘추상임 직한’ 회화와  스토리를 거의 읽기 어려운 ‘구상임 직한’ 회화가 오늘날 화단에서 관찰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동시대에 출현하는 ‘구상임 직한’ 회화에 스토리가 결핍되어 있거나 부재한 이유는 뭘까? 그건 스토리를 풍부하게 구현하는 다양한 미디어가 출현한 현실 앞에서, 스토리 재현에 대한 회화의 장악력이 상대적으로 뒤처져서 일 것이다. 19세기 사진의 출현으로 회화에서 추상미술이 대안으로 실험된 것처럼, 뉴미디어가 생산하는 스토리과잉의 시대를 맞은 회화는 구상의 외형을 지니되, 스토리의 구현보다는 아주 오래된 회화의 기본 속성을 강화하면서 차별성을 발견하려 든다. 나아가 동시대 의사소통 플랫폼인 SNS처럼, 단 한 번의 시각 자극으로 의사소통을 압축시키는 방식을 화면 위에 채택하는 것 같기도 하다. 


회화의 기본 조건으로부터 

전현선의 전시에는 반복해서 출현하는 도상이 있다. 화면에 자리를 잡은 ‘원통, 구, 원추’ 등은 세잔의 회화론을 연상시킬 수밖에 없으며,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화가의 자의식과 연결 지어 생각하게 만든다. 화면 위에 뜬금없이 등장하는 초대형 복숭아나 중세풍 복장의 인물도 20세기 초반 초현실주의 실험이 만든 ‘비현실적 상상력’을 21세기의 사정에 어색하지 않게 구현한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그만 화면을 4분할한 구성이나, 이야기의 상호 연관성이 낮은 그림들을 줄지어 늘어놓는 연출도 미디어 아트의 전유물처럼 인식되는 ‘비선형적 이야기’를 회화로 대체한 걸로 풀이될 법 하다. 전현선의 화면에는 형광색 포스트잇을 빼닮은 사각 도형이 기본 단위로 출현하는데, 그리드grid라는 20세기 모더니즘의 미적 단위를 떠올리게 되거나 혹은 윈도우windows라는 동시대 화면을 떠오르게 만드는 점에서, 그녀의 그림 소의 사각 도형은 회화의 원형과 동시대성을 단순하고 중의적으로 재현한 독창적인 단위 같다. 

전현선의 그림은 회색이 지배하며, 흘리기에 가까운 붓질 효과, 각기 크기가 다른 캔버스 여러 개를 임의로 배치해서 '구축된 화면' 등, 스토리를 전제하지 않고 회화성에 방점을 둔 평면 회화다. 삼각형 혹은 사각형 등 익숙한 도형들을 겹겹이 나열한 그림들에서 어떤 스토리를 읽어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회화는 색감의 안배, 캔버스의 임의적인 배치, 붓질의 재질감에 비중을 둔 점에서 20세기 초중반 전성기를 누린 추상미술의 문법과도 얼핏 닮아있지만, 이에 더해 재현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남다른 색감 선택과 캔버스들의 임의적 재배열로 새로운 볼거리를 만드는 점에서 선배 세대와는 다른 미감을 따른다. 


최은정의 작업도 평면 회화가 오늘날 당면하는 문제를 회화의 기본 조건을 통해 재고한다. 네모진 캔버스를 변형시킨 경우도 그렇지만 ‘흰 벽면에 납작하게 붙은 그림’이라는 회화 설치의 기본 조건을 다양한 부가장치를 통해 피해간다. 마스킹테이프로 조직한 기하학적 구조물들이 물감 덩어리의 재질감이 용처럼 꿈틀거리거나 풀잎처럼 나풀거리면서 화면 위에 볼록 튀어 나와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선명하게 재현하지 않는 구상회화다. 너무 익숙해서 진부하기까지 한 네모진 도형마저 무정형의 물감 덩어리와 공존하면서 남다르게 보인다. 


고전 회화 언어를 디딤돌 삼아

주제가 정확히 파악되진 않아도 남다른 볼거리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구상회화도 존재한다. 이런 작업은 곧잘 북부 르네상스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나 20세기 초현실주의 화풍을 연상시킨다. ‘넓은 광야에 서로 연결되지 않는 다양한 요소와 사건들을 나열하는 화면’으로 말이다. 화려한 색채의 세밀한 대상들이 물량공세 하듯 큰 화폭으로 밀려드는 김은진의 회화는 다양한 시각매체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오늘날, 회화라는 낡은 장르가 존재하는 여러 이유에 관해 생각하게 만든다. 스토리의 재현에 충실했던 김은진의 회화는 옛 회화의 역할과는 다른 요청을 받고 있는 동시대 회화의 조건에 대한 화답 같기도 하다. 촘촘한 군상들로 채운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이 결국 하나의 주제로 수렴된다면, 그와 닮아있는 김은진의 화면 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사건들과 구성요소들은 상호 무관한 관심사들의 열거처럼 보인다. 

광야에 군상을 늘어놓는 보스 풍의 화면 구성을 떠올리게 하는 화가는 더 있다. 권순영의 그림 속에는, 소녀 취향 감성을 서브컬처와 결합한 것 같은 귀엽고 그로테스크한 대상이 출현한다. 그림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흘러내는 촛농처럼, 그녀의 모든 그림에는 농염한 에로티즘이 묻어 있다.  


회화의 ‘연출’: 2차원에서 탈출하기

풍부하고 신선한 스토리텔링 생산이 영상 뉴미디어 매체에 의해 독점된 후, 회화는 스토리텔링의 단조로운 재현으로는 차별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고, 스토리텔링이 차지하는 파이는 회화 작품을 평가할 때 확연히 작아졌다. 이런 구조조정이 만든 맹점을 보완하기 위해, 전시공간을 ‘연출’하는 회화 작가의 시도도 자주 관찰된다. 이는 미술을 평면과 입체로 나누던 오래된 분류법으로부터 새로운 회화가 결별하는 가장 극적인 활동이다. 전현선은 회화 5점을 3열로 벽에 걸어 하나의 유기체처럼 제시하는 연출을 통해 회화작품의 압도감을 높였다. 그녀의 전시에선 벽 한 면을 고의로 공백으로 비워둔 경우도 있고, 상호 연관성이 낮은 여러 소형 그림들을 한 줄로 늘어놓은 것도 있는데, 이는 회화 작품에 ‘연출’이 개입된 경우로 봐야할 것이다. 전현선의 개인전에는 출품된 모든 그림들을 하나로 묶을 법한 도상이 감이 잡힐 듯 말 듯 여러 차례 출현하는 데, 이런 것도 개별 작품과는 별개의 연출로 봐야할 것이다. 


회화를 설치작품처럼 연출하는 건 백경호, 안경수, 김효숙의 개인전에서도 흔하게 관찰된다. 이들은 눈높이의 벽면에 수직 수평 맞춰 회화를 부착하던 설치법을 따르지 않고, 입체 작품 다루는 듯이 회화가 걸린 자리를 정하고 조명도 상황에 따라 조도와 위치를 조정한다. 스토리텔링으로부터 차별점을 얻기 어려워진 오늘날 회화의 약한 고리를 메우는 여러 장치 중 하나가, 설치미술처럼 회화를 연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위기론의 순환

미술계에선 하향세로 접어든 장르들이 ‘위기론’의 후보자로 반복적으로 지목되곤 한다. 동양화가 그랬고, 회화도 미디어아트의 강세로 꾸준히 위기론의 후보자로 언급되었으며, 비평 역시도 위기론의 빠지지 않는 대상이었다. 회화 위기론은 상투어가 아닌 기정사실처럼 회자되었지만, 변화된 매체 지형에 어울리는 새로운 회화를 통해 위기론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스토리의 비중이 실종된 ‘대안적’ 회화의 증가로 인해, 해석의 단서를 비평가가 찾는 일은 어지간히 어려워졌다. 회화 작품을 풀이하려고 작품과는 무관해 보이는 키워드와 형용모순의 수사법으로 가득 찬 평문이 출현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해석의 단서를 찾기엔 회화보다 시공간예술에 가까운 미디어아트나 복잡한 구조를 지닌 다매체미술이 오히려 편하다. 회화를 해석하는 비평가의 몫이 작아진 대신, 해석보다는 볼거리를 연출하는 전시 기획자의 몫은 커졌다. 미술 비평의 위기는 회화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회화’로 거듭난 사정과 그래서 연관이 있다. 




필자: 반이정 dogstylist@naver.com

미술전문지 외에 「중앙일보」 「시사IN」 「씨네21」 「한겨레21」 「한겨레」 「경향신문」등에 미술 칼럼과 시사 칼럼을 연재해왔다. 「교통방송」 「교육방송」 「KBS」 매스미디어에 미술 고정 패널로 출연했다. 중앙미술대전 동아미술제 송은미술상 에르메스미술상 등에 심사와 추천위원을 지냈고, 세마SeMA-하나 미술평론상 심사위원을 지냈다. 서울대 세종대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한국 동시대 미술 1998-2009』 『예술판독기』 『사물판독기』 외에 여러 책을 썼다. 유튜브 채널 ‘반이정의 예술판독기’를 운영한다. 


이 원고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 ‘2019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을 받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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