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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미술평론가의 현재

양은희

좌) 『비평의 조건』 표지
우) 서울시립미술관 주관 제3회 ‘SeMA·하나 평론상’ 공동 수상자 장지한·이진실


몇 년 전 한 미술평론가가 사석에서 어두운 얼굴로 토로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미술평론가라고 스스로를 부르는 것은 ‘자학적’인 행위라고. 오랫동안 수많은 작가들에 대해 글을 쓴 그의 입에서 그런 표현이 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경제적 보상이 적은 직업이라 하더라도 ‘자학적’이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에 대한 적지 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마음 한구석에서 미안함과 놀라움이 교차했었다.  

자학적이면서도 운명적인 평론의 길을 간 이들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 출간되었다. 고동연, 신현진, 안진국이 기획한 『비평의 조건: 비평이 권력이기를 포기한 자리에서』(2019)는 비평 또는 평론이라는 과제를 수행해 온 저자들이 같은 분야의 16명을 만나서 대담 형식으로 풀어낸 책인데 바로 위의 평론가도 포함되어 있다. ‘비평의 위기’를 습관처럼 말하는 시대에 그와 그의 선후배들을 찾아서 한 자리에 모은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이미 전시기획, 잡지발간 등 관련된 활동을 하면서 ‘전업 평론가’가 희소해진 현재를 점검하려는 의도도 기특한 책이다. 

말과 글에 보통 사람보다 두려움이 없는 이들이어서인지 대담에 참여한 대부분의 평론가가 솔직하게 이 길에 들어선 계기와 그동안 겪은 일과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 수십 년간 미술평론가들의 시선에서 본 미술계의 상황을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존 잡지에 대해 실망했던 일, 무모하지만 새로운 잡지와 책을 만들 수밖에 없는 환경, 작가들과의 미묘한 관계, 그리고 과거부터 복잡한 미술계 전반에 대한 ‘독설’에 가까운 표현부터 세련되다 못해 오래 생각해야 하는 표현, 심지어 그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과 오해까지 드러나서 소소한 독서의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시각 창작물을 언어로 표현하는 평론가들은 한국미술사에서 늘 불안하고 험난한 환경을 헤치며 왔다. 권위를 확보하는 일은 어려웠고 글에 대한 대가로 생계를 유지할 정도의 직업이 되지도 못했으며 약간의 명성을 얻는 정도에 그치곤 했다. 미술관과 미술잡지 등에서 활동하며 평론활동을 하거나 대학의 강사나 교수로 재직하며 간헐적으로 평론을 쓰는 경우는 그나마 운이 좋은 경우였다. 

작가와의 관계는 늘 껄끄러웠다. 평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작가들은 종종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평론가가 없다’라거나 ‘내 칼을 받아라’라는 말로 대립각을 세우곤 했다. 방근택처럼 1960년대 민족기록화사업에 참여한 작가들에게 날카로운 평을 내놓았다가 폭행을 당했던 평론가도 있다. 1970년대 국전에서 상을 받은 작가에 대해 신랄한 평을 했다가 그 작가의 아들에게서 ‘아버지가 상심하고 가출을 한 후 집안이 말이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언어의 칼을 거두어들인 평론가 유근준도 있다.

논쟁보다 금기를 우선시하는 환경, 그래서 비판적인 비평보다 해설적인 비평을 선호하는 환경은 ‘언어의 칼’을 무디게 만들었다. 거의 모든 것이 정치로 귀결되는 한국에서 비평은 세대, 학연, 젠더, 이데올로기 등 여러 경계가 만든 금기에 치여 어느 사이엔가 ‘권력이기를 포기’하고 목소리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용기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척박함은 누구든지 글을 쓰는 SNS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이 길을 가는 이들이 멸종 위기인 것도 아니다. 서울시립미술관이 하나금융그룹 후원으로 운영하는 ‘SeMA·하나 평론상’은 2019년 3회를 맞아 미술이론과 미학을 공부한 30, 40대를 등장시켰다. 국내 최고의 상금에다 나이·학력·전공·경력·직업 등 일체의 자격을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평론으로만 수상자를 선정한다는 이 상에 31명이 지원했고 그중 70-90년대 생이 90%였다고 한다.


- 양은희(1965- ) 뉴욕시립대 미술사 박사. 현대미술의 전지구화 현상, 비엔날레 등 연구. 『22개 키워드로 보는 현대미술』(공저, 키메이커, 2017), 『뉴욕, 아트 앤 더 시티』(랜덤하우스 코리아, 2007, 2010) 지음. 『개념미술』(2007), 『기호학과 시각예술』(공역, 1995) 등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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