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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누가 다원예술을 두려워하는가? : 매체 특정성과 확장성

고동연

최근 국내 미술계에서 1920-30년대 바우하우스에서 사용되던 ‘종합예술,’ 혹은 1960년대 ‘인터미디어’의 개념을 연상시키는 ‘다원예술’이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된다. 국내 문화예술계에서 ‘다원예술’이라는 용어가 유행하게 된 경위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이 용어가 기관이나 국공립기금에서 널리 사용되는 데에는 문화 정책적인 필요성이 있을 것이라 짐작된다. 무엇보다도 ‘다원예술’로 불리는 많은 예술이 실험연극이나 공연 예술의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시각예술 분야의 ‘편협성’을 극복하고 관중이 모여 감상하는 공연 예술로의 확장을 꾀하는 문화 정책의 방향성과 요구가 맞아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선 ‘다원예술’의 용어 자체를 문제시하기보다 그 이론적 문제점과 모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다원예술’이 확장성을 담보로 하는 듯하지만, 통섭이나 융합이라는 과학연구분야에 어울릴 법한 단어가 미술계에서 적용되며 암암리에 예술의 장르가 비교적 체계적으로 분리나 결합이 가능한 것으로 오해받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미술계 내부에 팽배해진 다양한 매체를 결합하는 경향을 대변하는 ‘다매체’라는 용어와 혼용되고 있는 듯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차이가 있다.

‘다매체’의 경우 유사한 아이디어를 다양한 장르나 매개체를 사용해서 다방면으로 함께 발전시킨 예를 지칭하는 것에 반하여, ‘다원예술’은 대부분 시각 예술을 벗어난 공연 예술로의 확장성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고 기존의 예술적 매체가 지닌 한계를 뛰어넘기 위하여 여러 감각기관을 자극하는 다양한 예술적 매체와 장르를 결합해야 한다는 일종의 역사적 정당성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이 타당성을 인정받으려면 먼저 매체의 차별성, 즉 특정한 예술 장르가 다른 장르로부터 명확히 구분된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

다원예술이 상정하는바 특정 예술이 정해진 어떤 효과를 만들어내거나 감각을 자극한다는 식의 ‘인위적인’ 생각은 첫번째 모더니즘의 매체 특정적인 입장을 연상시킨다. 매체 결합이 빚어낸 다원예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단 특정 매체나 장르가 지닌 축약 가능하고 전문적인 속성이 상정돼야 한다. 매체의 편협성과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편으로서 다원예술이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 그러하다. 그렇지 못하면, 다원예술은 공허하거나 형식적인 언어에 불과할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용어는 창작환경을 위축시킬 수도 있다. 각종 기금이나 비평을 통해 널리 사용되면서 작가 스스로 환경적 강요나 선택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내재화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기존의 이론은 대부분 창작 단계에서 매체의 특수성을 논한다. 하지만 『예술 이후』(2013)의 저자 데이비드 조슬릿(David JOSELIT)이 사용한 ‘포맷(format)’이라는 용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예술적 장르나 매체 구분은 모든 정보나 이미지가 디지털화되고 가상공간에서 소통되는 시대에 구태의연해졌다.1) 작업이 소통, 전시, 유통되는 방식에 따라관객에게 전달하는 효과, 작업이 존재하는 방식, 관객군 등이 더 큰 폭으로 변화하거나 다변화되기 때문이다. 창작과 유통의 구분 또한 급격하게 허물어지고 있다.

현대미술의 이론을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매체가 본디 특정한 미학적 효과를 만들어내고 이에 따라 특정한 감각을 충족시켜준다는 방식의 생각은 한때 유용하였으나 1980-90년대를 거쳐 매체 변천사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진행된 후 비판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노엘 캐럴(Noël CAROLL)은 예술이 특정한 기능을 체계적으로 나누어서 공유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2) 연극과 영화로부터 계승한 내러티브적 속성을 강조하는 상업 영화와 사진이 가진 구도나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예술 영화는 각기 영화의 특성을 달리 규정하여 왔으며 심지어 이데올로기의 적대 관계를 형성해왔다. 하지만 서로 다른 영화의 ‘특성’은 모든 영화나 산업에서 공존해 왔고, 이론은 축약 가능한 매체의 성격을 규명했다기보다 특정한 창작물이 처한 기술적, 정치적, 경제적인 여건을 드러냈다. 이론가, 문화정책수립자, 작가는 각각의 처지에 따라 매체의 성격을 달리 해석하고 취사선택하여 세력화해 온 것이다.

전통적인 미술의 장르로 여겨지는 회화, 조각, 사진 이후 설치, 행위, 실험연극, 영화, 미디어아트에서도 역사적으로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2000년대 중반 무라카미를 비롯한 일본 미술비평가들이 서구 중심적인 순수예술의 개념과 캔버스 유채화에 대하여 비판하였으나 캔버스 유채화 또한 17-18세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상인 계층과 길드 조직, 19세기 부르주아 문화의 확산에 따른 역사적 산물에 불과하다.

19세기 특정 장면을 연극적으로 연출하는 타블로 비방(Tableau Vivant)은 19세기 초 유행하던 역사화와 연극이, 그리고 이후 사진이 밀접한 영향 관계를 주고받으며 발전되었음을 일깨워준다. 회화에 있어 수직, 수평, 관객의 특정한 감상방식, 표면의 비물질성, 물질성 논란은 회화가 평면성이 아닌 연극성, 시간성, 물질성과 오랫동안 깊은 연관성을 지녀왔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 최근 메타버스를 비롯한 가상공간에서 열리는 각종 문화예술 행사는 매체의 수축성이나 확장성에 대한 논쟁에서 전혀 다른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려준다. 메타버스가 실제로 창작환경에 어떤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올지, 관객이 이로부터 새로운 경험을 도출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시기상조이나 메타버스의 경우에도 미학적 특성보다는 그 외적인 요인, 즉 연동된 경제적 지표(결제수단인 코인), 기술적인 상황(프로그램), 법률적인 근거(저작권)에 의하여 향방이 결정될 것이라 예상된다. 무엇보다 매체의 특성을 논하는 과정에서 창작자의 의도나 ‘원래’ 예술작업의 상태보다 어떤 경로를 통하여 작업이 유통되고 관람 될지의 주변 여건이 더 중요해졌다. 기존의 전통 매체나 장르 구분, 그리고 결합(혹은 융합, 다원)에 집중된 논의가 무의미해지는 순간이다.



박성준, ‘백지장’ 2021.5.1-5.15 대동인쇄 전시 포스터


올해 리움미술관의 ‘아트스펙트럼2022’전(3.2-7.3)에 참여한 박성준의 2021년 전시 ‘백지장’은 이러한 측면에서 흥미롭다. 연극 전공자이자 대학에서는 상업 영화를, 스위스에서는 미디어아트를 전공한 작가는 연극과 같은 무대를 일종의 영화적인 세트장으로, 미디어아트의 화면은 일종의 회화의 벽면처럼 꾸민다. 작가는 타블로 비방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서대문역의 당시 철거 직전의 인쇄소에서 열린 ‘백지장’전에서 작가는 다양한 매체 결합을 보다 애초에 서로 다른 매체적 관습을 활용해서 관객의 반응을 실험해 본 예라고 할 수 있다. 매체의 결합이라는 기술적인 문제보다 가상성과 물질성이라는 공통된 질문을 서로 다른 매체를 통하여 추구한 것이다. 미디어아트를 캔버스와 같은 스크린에, 연극에서 두드러진다고 믿어져 온 물질성을 영화 세트장에, 연극적인 퍼포먼스를 동영상으로 번안해가면서 궁극적으로 관객의 다양한 반응에 집중했다.

관객은 ‘백지장’전을 오프라인, 인스타그램, 웹사이트의 세 가지 경로를 통하여 감상할 수 있다. 오프라인 전시는 철거 직전의 그야말로 날 것의 물질성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서대문역 근처에서 열렸다. ‘귀신의 집’을 방불케 할 만큼 어두운 공간에서 실제로 관객이 훈련된 간섭자의 조력을 받으면서 경험하였다면, 인스타그램에서는 피드백을 받으면서 전시를 관람한다.

반면에 작가의 웹사이트 온라인 전시에서 관객은 언제든지, 정확히 말하면 전시의 환경, 관객의 반응을 끄집어내 본인이 보고 싶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어둡고 침침한 공간을 관람객 본인이 원하는 다양한 각도에서 진입할 수 있다. 반면에 오프라인에서 관객은 거의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어두운 오래된 공간을 ‘조력자’의 인도에 따라 감상한다. 관객은 온라인에서 새의 눈 시점, 전시장을 둘러싼 주위 환경을 오프라인보다 다각도에서 관찰할 수 있다. 조명이나 경로도 직접 선택할 수도 있다. 이때 전시장 안과 밖의 경험이 혼동되기도 한다. 이제 관객이 마음대로 경험을 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획자의 역할도 수행하게 되었다.

최근 온라인을 통한 다양한 전시 환경의 변화는 조슬릿이 지적한 바와 같이 더이상 예술의 매체 특성이 창작의 환경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누가 다원예술을 두려워하는가? 이 기회를 통해서 특정한 창작 예술이 지닌 특성을 이론가 혹은 문화정책수립자가 한정적으로 이해하는 지점을 보다 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다원예술’ 전문인이라는 비평가, 큐레이터 등이 현실적으로 예술 매체나 장르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서로 다른 예술 매체를 근본적으로 연결해서 보지 않고 단절해서 보는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기에 결국 다원예술도 어느 한 특정 매체(실험 연극, 퍼포먼스 아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다원예술 조차도 분절된 또 다른 예술 장르라고 상정하는 듯하다.

한동안 각종 기금이나 정책, 비평문에서 다원예술이라는 용어가 각종 이론적인 오류, 부정확성에도 꾸준히 사용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용어 그 자체가 아니라 용어가 숨기고 있는 욕구, 인위적인 ‘정리 정돈’의 욕구가 실제 창작, 이론의 발전을 저해하고 위축시키며 단순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세력화나 유행의 측면에서도 문제다. 기금 시스템에 의존해 온 작가가 자신이 펼칠 수 있는 매체나 장르의 다양한 표현 가능성을 한정시켜서 접근한다면 이론이나 정책이 오히려 창작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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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avid Joselit, After Art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3), p. 55.
2) Noël Carroll. “The Specificity of Media in the Arts,” The Journal of Aesthetic Education, Vol. 19, no. 4 (Winter, 1985), pp.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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