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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두 가지 문해력 손실

박수지

요즘 여실히 실감하는 두 가지 문해력 손실이 있다. 하나는 문자의 과도한 사용에 기인한다. 다른 하나는 문자의 과도한 축약 탓이다. 문자를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으로 거친 진단을 내려본 곳은 의외로 시각예술이다. 시각예술은 본래 창작의 재료로 삼는 범위가 다채로우니 문자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일 리는 없다. 문자가 작품의 고유한 형식이 되어 상투적인 사고에 파열을 불러일으키는 근사한 예술도 있다. 그러나 ‘과도함’으로 판단되는 때는 문자가 과연 덧붙이거나 덜어낼 것이 없는 창작의 요소로 선택된 것이 맞는지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다. 예컨대 작품의 독창성을 선점하기 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그럴싸하게 나열하는 수단으로 문자가 사용되는 때다. 더러는 문자가 시청각 자료를 느슨하게 보충하며 작품으로서의 구색을 갖추는 요소에 그친다. 이러한 문자 삽입은 애초에 ‘예술’로 납득될 만한 정도의 형식을 드러내기 위한 부가적인 제스처에 머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때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감각’하려는 문해력 발휘는 쉬이 헛수고가 되곤 한다. 나는 이 현상이 주장이 감각을 대체할 때, 인정받는 기쁨이 창작하는 만족을 대신할 때, 설명이 숙고를 앞지를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2022년 휘트니미술관의 전시 ‘The Whitney’s Collection: Selections from 1900 to 1965’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장 캡션 중 일부.
“말로 할 수 있다면 그림으로 그려야 할 이유가 없죠. 
(If you could say it in words there would be no reason to paint.)”.


둘째로 문자의 과도한 축약은 예술 외의 거의 모든 곳에서 발생한다. 예컨대 스마트폰의 시스템은 빠른 단축어 사용을 제안한다. 간편한 알고리즘에 여러 단계의 수행 과정을 의탁한다. 내가 자주 쓰는 관용구는 저장해두었다가 한 번의 터치로 불러온다. 이때의 문자는 생각하며 쓰는 것이 아니라 게으르게 되풀이된다. 단어 하나를 선택할 때 당시의 상황, 감정, 조건에 따라 새롭게 고민하는 과정은 쉽게 누락된다. 거대한 광고 덩어리인 소셜 네트워크에서 사람들을 사로잡는 말은 의미가 겹겹이 쌓여 하나로 응축된 단어가 아니라, 말초적인 자극의 이니셜만 결합해놓은 축약어다. 이제 하나의 문장이 파생시키는 다채로운 의미망은 번거롭고 불필요한 과정에 그쳐 버린다. 이때 서로의 문해력은 거침없이 쪼그라든다. 이런 위축을 틈타 편 가르기를 위해 얼버무려진 단어가 사람들의 입장을 분열시키는 용도로 사용된다. 끝내 이 강력한 분열이 창작 과정에까지 파고들어 예술을 갉아먹는다. 나는 일련의 현상이 편리를 위해 생각을 희생할 때, 어떻게든 시간이라는 자본을 확보하라는 효율 강박이 사고를 지배할 때, 문자가 인간 의식의 산물로 여김 받는 게 아니라 이해관계에서 우위를 확보하려는 수단으로 전락할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이 두 가지의 문해력 손실이 지금의 예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소 비관적이다. 예술 작품을 통해 예술을 매개하는 기획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비감에 휩싸인다. 두 가지는 어느 한 방향만 작동하지 않고 서로를 자극하며 무궁한 손실을 누적시킨다. 작품이 제 스스로의 존재감을 항변하기 위해 설명에 급급해하는 모습을 볼 때 느끼는 참담함이 너무 잦다.
때로는 예술의 근본적 속성을 되물으며 생기는 참담함 자체가 일종의 오만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솟는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 복합적인 고난이 될수록, 창작의 환경이 숨 막히는 속도에 휘말릴수록, 창작자가 자신의 문해력을 지켜내는 일은 대단히 곤란한 일이 될 수 있다. 빠른 결과를 종용받는 탓이다.
그럼에도 결국 예술과 문자의 관계, 삶과 문자의 관계에서 자신의 문해력을 훼손하지 않는 방법은 자신의 선택에 관한 끝없는 질문이 아닐까. 비록 자신의 생각에 의심이 드는 나머지 단 하나의 문장도 쓰기 어려워질지언정, 문자의 과도한 사용과 과도한 축약에 사고를 내맡겨버리는 나태만큼은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은 몹시 단순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미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렇게 말해왔다. “말로 할수 있다면 왜 예술 작품을 만들겠어요.”




- 박수지(1989- ) 큐레토리얼 에이전시 뤄뤼(RARY) 운영 및 기획자 플랫폼 웨스(WESS) 공동 운영. 미술문화비평지 《비아트》 편집팀장(2014-16), 2017 제주비엔날레 코디네이터(2017), BOAN1942 큐레이터(2018)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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