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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여기는 실미도

이선영

작가 서국화는 뒤늦게 ‘레지던시’에 처음 참여했다. 웬만한 작가는 보통 레지던시를 몇 개나 거치고, 전국에 깔린 레지던시를 일주 중인 작가도 꽤 되는데, 뒤늦게나마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한국 미술의 현장에 참여한 것이다. 여수 소재 예울마루 창작스튜디오의 물리적 조건은 너무나 완벽하다. 작은 섬에 위치한 이 레지던시는 섬 꼭대기에 있는 미술관과 아랫자락의 창작스튜디오 몇 동 등, 오직 예술 관련 시설만 있는 데다, 섬 전체에 멋진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고, 업무용 전기차만 가끔 다니며 일정 시간대는 일반인의 출입도 막혀있는 최적의 조건이다. 둘레길을 지나서 갈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시설이 GS칼텍스 예울마루 장도 전시실이라, 산책자의 필수 코스이며, 여기에서 하는 행사의 흥행은 거의 보장된다. 몇 년 전 손상기 화백에 대한 세미나를 하러 처음 방문했을 때, 학술 세미나임에도 많은 참관객이 있던 것을 기억한다. 기업의 개발자가 예술 시설을 중심에 놓은 것은 예술의 공공성을 존중한 것이다. 요즘도 개발이 한창인 이 지역은 섬의 아름다운 풍경을 끼고 고급 아파트와 숙박시설이 들어서고 있는 핫플레이스이다. 3개 면이 통유리 창으로 된 작업실에서는 고깃배가 떠 있는 바다 풍경이 보인다. 작가는 이런 이상적인 작업실에 입주해 설레기도 했지만, 이제는 주변 풍경은 보지 않고 작업에만 몰입하고 있다.



장도의 풍경이 보이는 창작스튜디오에서 작업에 몰입하고 있는 서국화 작가


얼마 전 스승으로부터 들은, 작업하는 이에게 모든 조건이 완벽한 이 곳은 ‘장도가 아니라 실미도’라는 말이 뇌리에 꽂혔기 때문이다. 실미도는 동명의 영화가 히트한 이후, 악전고투 끝에 살아남아 나가야 하는 장소를 상징해왔다. 이 풍광 좋은 곳에서 실미도를 떠올린 것은 작업을 치열하게 하는 자만이 가능한 발상이다. 대개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레지던시의 물리적 입지는 좋아진다. 서울이라는 중심과 그 인근의 레지던시 가운데는 그 명성과 달리, 작업을 펼치기에 좁은 곳도 있고, 작가의 사생활이 잘 보장되지 않는 열악한 곳도 있다. 반면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인구가 대폭 줄어들어서 그런지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경향이 있다. 해안을 끼고 있는 여수뿐 아니라, 경상도 쪽으로 가면 시골 초등학교의 모습을 살린 그림같은 레지던시들도 있다. 물론 그런 곳도 지역의 정치가나 공무원이 그 장소를 계속 예술 관련 기관으로 유지시켜 줄지 말지에 대한 불확실성이 있지만 말이다. 얼마 전 지자체 수장이 바뀌었다고 존폐의 기로에서 떨고 있는 지역의 문화기관도 꽤 있다는 소문이다. 작가는 경치 좋은 곳에 가서 휴식을 취하는 한가로운 이가 아니다. 그곳을 플랫폼 삼아서 이런저런 인간적 인연을 이어가는 곳도 아니다. 작업은 전투다. 작업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섬다리


창작스튜디오, 사진 제공: 예울마루


길로 치면 오르막이지 내리막이 아니다. 영감은 불현듯 다가오겠지만, 그 또한 작업 중에 떠오르는 영감일 것이며 가능성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치밀한 방법론은 필수다. 그림같은 작업실을 짓고 나서 그림은 오히려 소홀히 하는 작가도 종종 봤다. 물론 이것은 작가가 열악한 환경에서 고생을 해야만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말은 아니다. 대부분의 작가에게 작업실은 필수이고, 외로운 작업의 동행이 되어줄 커뮤니티에 대한 요구가 있다. 하지만 작업실이 좋다고 작업이 자동적으로 잘 진행된다면 예술은 참 쉬울 것이다. 물리적 안락함이 예술과 삶을 화해시키고. 작가의 절박한 요구를 어느 정도 해소시켜줌으로써 작업의 강도와 밀도가 다소간 약해지는 점은 인지상정이다. 창밖에 펼쳐진 것이 바로 예술인데 왜 애써 예술을 해야겠는가. 작업이라는 창 또는 문밖에 출입구가 없는 작가에게 작품은 비로소 자신을 내어준다. 작업은 자신의 전 존재를 건 싸움이다. 예술은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것이 작가 자신에 대한 희생과 헌신이라는 점에서 견딜 만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피상적이 아닌 진한 소통을 낳는다. 세상은 그러한 소통에 대해 사회는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여름 한가운데서 매미 울음소리가 처절하다. 모두들 자기만의 실미도에서 살아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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