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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하이쿠 읽는 여름날

박영택

길고도 지루한 혹서와 그 틈으로 장마와 태풍을 겪으며 여름을 보내고 있다. “매미들은 소리로 마을을 이룬다...여름에는 사람도 매미네 마을에 산다”(정현정)는 시처럼 이명같이 끊이지 않는 매미 소리를 귀에 달고 있으면 저 자지러지는 울음의 끝자리를 타고 사라질 것 같은 환영에 잠긴다. 그 소리에 몸을 가볍게 지워내고 싶은 것이다. 하여간 그 소리를 피할 수 없이 받아내면서 가장 짧은 글을 읽는다. 이럴 때는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의 하이쿠를 읽는 게 제격이다. 독서란 것도 그에 맞는 적당한 시간과 계절, 장소가 달리 있다는 생각이다. “작품의 한 줄 한 줄이 마음에 잔잔하게 스며드는 장소-그런 곳이 내게는 곧 ‘서재’다...존 업다이크를 읽기 위해서는 존 업다이크를 읽기 위한, 존 버치를 읽기 위해서는 존 버치를 읽기 위한 가장 좋은 장소가 어딘가에 있으리란 기분이 든다.”(「존 업다이크를 읽기에 가장 좋은 장소」, 무라카미 하루키)

나 역시 책의 종류에 따라 읽는 장소를 달리 고르는 편이긴 하다. 아침 시간의 카페에서 전문 서적을 공들여 읽는 편이고 차 안에서는 비교적 가벼운 내용의 책을 접하며 도록이나 잡지는 소파에 편히 누워 일독하는 식이다. 그런데 정작 시는 그렇게 읽어나가기가 편치 않다.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서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하이쿠를 읽는다.



겸재 정선, 횡거관초도, 비단에 담채, 29×23cm


세상에서 가장 짧은 운문의 형식으로 알려진 하이쿠는 열일곱 자의 정형시다. 가장 함축된 문장으로 이끌어 내는 상상력과 단어를 갑작스레 ‘툭’하고 던져 일으키는 감각적인 힘이 대단히 풍성하다. 대표적인 하이쿠 시인인 바쇼는 이름 그대로 파초를 좋아했고 평생을 이어온 방랑길에서 객사했다. 동북아시아 문화에서 문인의 파초 사랑은 유별났다. 시원하게 생긴 잎과 이국적인 생김새, 길다란 잎이 주는 시원함 때문에 예부터 많은 선비가 좋아하던 파초는 생김새가 봉황의 꼬리를 닮아 부귀와 평화를 상징하는 식물이었다. 특히 커다란 형태에 짙푸른 색깔이 집안 장식에 좋았기에 선비의 대표적인 애완품이었던 파초를 처마 밑쪽에 심어두어 여름날 비가 내리면 커다란 파초 잎에 드는 빗소리를 즐겨 들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운치가 새삼스럽다. 아마도 그 아름다운 소리로 세속의 탁음을 지우고자 했을 것이다.

한편 당나라 서예가인 회소(懷素)는 미친 듯이 휘갈긴 초서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는 종이 살 돈이 없어 파초 잎에 노상 글을 쓰며 기량을 닦았다고 전해진다. 그 뒤로 파초에는 ‘독학’이란 의미가 덧붙여졌다. 자연스레 검박과 가난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비들은 속세의 티가 없는 청초한 모습의 파초를 정원수로 즐겨 심고 그 자태를 보면서 학문수양을 향한 열정을 불태웠다.

중국 송나라의 장재는 ‘파초’라는 시에서 “파초는 심이 다하면 새 가지를 펼치고 새로 말렸던 새 심이 은연중에 뒤따르네. 원하노니 새 심에서 새 덕 기름을 배우고, 새 잎으로 새 잎을 넓히라는 걸 따르리라.”고 읊었다. 선비들이 파초를 심고 저 글을 기둥의 주련에 새겨두어 이 시의 뜻을 새삼 매번 되새겼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새로이 피어나는 심지에서 새로운 덕을 찾고, 새로이 피어나는 잎새에서 학문 도야의 꿈을 키우겠다는 다짐을 키웠던 것이다.

새삼 이 여름날 파초의 덕과 의미를 생각해보는 까닭이다. 그러면서 파초와 바쇼와 하이쿠의 관계를 생각하다 보니 이우환의 작업이란 것도 다름 아닌 하이쿠의 영향을 짙게 반영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바쇼의 한국어 번역 시집에 추천의 글을 쓰기도 했다. 그의 작업이 서양의 현상학이나 구조주의 철학에 기반을 두기도 하고 서구현대미술에 깊이 연동되어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본 문학과 니시다 기타로의 무와 선의 철학과 순수함과 단순함, 다시 말해 와비사비의 미학에 더욱 깊이 침윤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여간 혹독한 여름날 나는 바쇼의 하이쿠를 읽으며 지낸다. 이 난세도 언젠가는 지나간다는 생각으로 버틴다. 영원할 것 같은 시간을 사는 무수한 욕망의 초상을 지워버리고 나는 그저 책을 읽을 만한 공간을 찾아 돌아다니며 생을 도모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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