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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김구림과 일본 모노하

황인

최근 갤러리신라가 『모노하와 태도들』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을 펴냈다. 한국과 일본의 소장 이론가의 글을 묶은 책이다. 이 가운데 가기타니 레이(鍵谷怜, 1993- )가 쓴「이우환의 더블 이미지: 한국에서의 모노하와 모노하 이론의 수용」은 매우 흥미로운 글이다.

모노하와 한국의 단색화와의 관계를 추적했는데 그 아이디어가 신선하다. 그런데 나의 지식으로는 모노하와 한국의 단색화는 시대정신이나, 양식의 측면에서 상호 관련성이 거의 없다. 오히려 단색화보다 먼저 일어난 한국의 비평면(非平面) 미술과 양식적인 면에서 유사성이 더 많이 발견된다.

한국의 비평면 작가로는 김구림, 이강소, 이건용, 김영진 등이 있는데 김구림을 제외하곤, 이들은 스가 기시오, 세키네 노부오 등 모노하 작가들과 마찬가지인 1940년대 초반생이다. 비슷한 연령대라는 점에서 모노하와 한국의 비평면 미술은 시대정신의 공유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는 있겠으나 작가와 작품의 접촉과 교류에 의한 상호영향 관계는 극히 미미하다. 이우환 일변도의 모노하 이론이 국내에 적극 소개되긴 했지만 아쉽게도 이우환을 제외하고는 1960년대 말에 시작된 모노하가 전성기를 이루던 1970년대 초반, 일본 모노하의 작가, 작품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없었다.



김구림, 삽, 1974, 오브제, 80×26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그런데 이 무렵 일본 모노하의 현장에서 모노하의 작가, 평론가들과 직접 교류한 작가가 있었다. 그는 김구림이다. 가기타니 레이가 김구림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한국에서 왕성한 실험미술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현지에서 일본의 여러 모노하 작가들과 교류하고 전시회를 연 당대의 한국 작가는 김구림이 유일하다. 그런데 이 부분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도 반복적으로 놓치고 있다. 김구림은 1973년에서 1975년까지의 채 3년이 안 되는 시간을 일본에서 보내었다. 이때 김구림은 일본에서 곽인식, 이우환, 곽덕준 등 한국계 작가들과 교류하는 한편, 스가 기시오(菅木志雄) 등 모노하 작가, 미네무라 도시아키(峯村敏明) 등 모노하 평론가, 일본의 실험미술을 대표하는 다카마쓰 지로(高松次郎) 등과 교류한다.

1973년 시로다화랑, 1974년 니레노키화랑에서 열린 김구림의 개인전을 계기로 이루어진 평론가 미네무라와 김구림의 만남과 대화는 당시 한국현대미술의 사유의 최고 정점을 짐작할 수 있는 소중한 기록으로 남겨져야 한다. 시로다화랑에서 김구림은 일부러 새 삽을 낡게 만들어 전시했다. 시로다화랑에 나타난 미네무라가 100년 후에 당신이 낡게 만든 작품으로서의 삽과 실제로 생활 속에서 쓰이는 실용의 낡은 삽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 

김구림은 1년 후 니레노키화랑의 전시 때는 실용의 삽에다 그림을 그려 낡게 만들어 전시했다. 이로써 대상(사물, 삽)과 표현(언어, 낡은 삽의 그림)은 분리되었다. 불명확한 미지의 대상인 삽을 삽으로 온전히 존재하도록 남겨두고 그림은 그림의 영역으로 살려주었다. 이 대답이 미네무라를 몹시 만족하게 하였다. 대상(物, 모노)을 언어에 묶어두지 않고 그대로 살려두는 게 모노하의 본령인데, 일본의 작가가 아닌 한국인 작가가 이를 절묘하게 구현했으니 모노하의 평론가 미네무라로서도 매우 놀라운 일이었으리라.

김구림은 스가 기시오의 퍼포먼스를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스가의 퍼포먼스는 김구림이 귀국하자마자 이건용에게 전달되었다. 자극을 받은 이건용의 첫 퍼포먼스가 김구림의 주선으로 백록화랑에서 열렸다. 퍼포먼스가 아닌 당시 일본에서 쓰던 ‘이벤트’란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김구림과 일본 모노하는 한국과 일본의 현대미술비교사 측면에서도 많은 연구가 요구되는 주제다.



- 황인(1958- ) 한양대 공과대학 산업공학과 학사, 홍익대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계간 『현대미술』 편집장(갤러리현대), 갤러리현대 큐레이터 역임(1987-91), 홍익대 대학원 출강(20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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